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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게리 쿠퍼의 세 마디

시오노 나나미의 책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는 이탈리아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한 대목이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같은 걸작 코미디를 만든 빌리 와일더가 왕년의 미남스타 게리 쿠퍼에 대해 한 말이 재미있는데 잠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세상의 모든 여자에게 인기를 누린 것은 딱히 멋진 대화 솜씨를 가져서가 아니야. 다만 그는 들을 줄 알았어. 이건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여자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특별히 집중하지도 않았지. 다만, 계속 떠들어대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때로 다음의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를 곁들이는 거야.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사이에 여자들은 자연히 그에게 몸을 던지게 되는 거야.”

포털사이트 뉴스에 오른다면 “게리 쿠퍼, 여자를 정복하는 데는 단 세 마디면 충분했다” 같은 제목이 붙을 내용이다. 게리 쿠퍼의 이런 일화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감상은 각자 다를 것이다. 남자라면 ‘그놈 참 대단한걸’ 싶어 배가 아플 테고, 여자라면 ‘여자를 바보로 아는군’ 싶어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남녀의 반응이 그런 식으로 단순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내게 인상적인 대목은 단 세 마디로 상대가 계속 말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빌리 와일더가 지나친 과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세 마디건 열 마디건 상대가 마음을 열고 말하게 하는 그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을 것 같다. 잘생긴 외모와 스크린에서 보여준 믿음직한 이미지가 절대적이었으라 짐작하지만 그것 말고도 뭔가 있지 않았을까 싶고, 있다면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로 하여금 술술 말하게 만드는 그 기술은 여자를 꼬이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건 무엇보다 기자들한테 필요한 능력이다(형사한테도 그렇겠지만 아무리 게리 쿠퍼라도 범죄사실을 이야기할 여자는 없으리라). 그래서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라는 말만으로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상대의 마음이 절절히 드러나는 인터뷰를 하는 상상 말이다. 기자 생활을 하다 생긴 병일 텐데 이런 망상이 우뇌를 비집고 싹튼다.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단지 게리 쿠퍼처럼 안 생겨서 아닌가 좌절하기도 하면서.

물론 대체로 많이 묻고 많이 말해야 좋은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기자는 정말 잘 듣는 게 중요하다. 워낙 언론매체가 많아져서 별별 인터뷰가 넘치는 세상이지만 기사를 보다보면 정말 잘 듣고 쓴 기사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들도 적지 않다. 박찬욱 감독이 예를 든 것처럼 기자가 질문을 해놓고 그걸 감독의 답변인 것처럼 옮겨놓는 것은 그나마 애교있는 경우이고 상대가 힘주어 얘기한 대목은 쏙 빼놓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 적는 왜곡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게리 쿠퍼처럼 마음을 열게 만들진 못하더라도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말아야 할 텐데 말이다. <씨네21> 너나 잘해. 이런 말을 들을 소리일 텐데 그래서 이 기회를 빌려 우리가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그나저나 진짜로 ‘설마’, ‘정말로’, ‘그건 처음 듣는 말인데’라는 말만으로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아님 ‘왜요?’, ‘그렇군요’, ‘그럴 리가요’가 나으려나? 어디선가 우린 게리 쿠퍼가 아니라고요, 라는 기자들의 항의가 들썩이는 듯하다.

P.S. 드디어 새로운 기자를 뽑았다. 지난 1년간 <씨네21> 객원기자로 일했던 강병진과 내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김민경, 두 사람이 최종 합격자가 됐다. 두 기자의 활약을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