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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이자벨 위페르

창백한 얼굴의 주근깨투성이 소녀가 있다. 갓 스물이 됐을까.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그녀는 지난 여름 해변에서 이지적인 느낌의 대학생을 만나 파리에서 함께 살았더랬다. 출근하는 그녀를 침대로 끌고 와 안으며 속삭이던 남자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의지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배운 적 없지만 그건 사랑이었고 그녀의 전부였다. 하지만 꿈같은 날은 가고 그녀가 출근하는 동안 남자는 자지 않으면서 자는 척한다. 그녀가 씹는 사과 소리가 거슬리고 변증법이 뭐냐고 묻는 그녀의 무식함이 부끄럽다. 여자는 눈물을 머금고 남자의 집을 나와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고 우연히 소식을 접한 남자가 병원으로 찾아온다. 넋이 나간 듯 더 창백하고 여윈 그녀를 만난 뒤 남자는 도망치듯 병원을 떠나고 자리로 돌아온 여자는 레이스를 뜨며 물끄러미 뒤돌아 쳐다본다. 아무것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그 눈동자.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 그 표정. 클로드 고레타 감독의 1977년작 <레이스 짜는 여인>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엔딩장면을 선사한다. 20대 앳된 이자벨 위페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그 장면을 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저 얼굴을 기억한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에서 자기 심장에 칼을 꽂으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 얼굴. 20대나 50대나 변함없이 무표정한 얼굴만으로 관객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카리스마. 이자벨 위페르를 만난다는 건 마음 단단히 먹고 해야 할 일이다.

언젠가 이자벨 위페르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 캐릭터에 대해 연민하지 않으려고 한다. 난 그냥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고 이해하려고 할 뿐이다. 만약 캐릭터를 동정하면 난 그 캐릭터를 이상화하게 된다. 로맨틱한 캐릭터를 끄집어내는 짓을 난 하지 않는다. 난 그들을 이상화하지 않고, 그렇게 동정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인물로 만든다. 난 영화에서 이렇게 하는 것으로 질문의 형상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답변의 형상이 아니라. 그것들은 아주 열린 문장을 만드는 것이고 각자의 주관에 따라 자신만의 대답을 발견하게 한다.” 이자벨 위페르 연기의 특징은 자신이 한 이 말에 들어 있다.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맨눈으로 인물과 대면하게 만든다. <레이스 짜는 여인>이나 <피아니스트>를 특별하게 만드는 그의 연기는 그래서 ‘열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끔 차갑고 건조하다. 아마 이자벨 위페르의 이런 연기와 상극인 것은 흔히 말하는 ‘신파 연기’이며 말 그대로 폭발하듯 내지르는 ‘열연’일 것이다. 영화에서 이자벨 위페르는 관객의 관음적 시선을 모조리 튕겨내는 듯 보인다. 배우에게 무슨 보호막이라도 씌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거꾸로다. 이자벨 위페르의 말을 음미해보면 그가 한 일은 오히려 배우를 둘러싼 어떤 보호막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캐릭터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보호막을 말이다. 이자벨 위페르가 칸영화제에서 2번이나 여우주연상을 탄 것은 그런 연기가 그만큼 희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하이퍼텍 나다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진행되는 이자벨 위페르 특별전은 그걸 볼 드문 기회다.

이자벨 위페르 같은 배우를 보고 있으면 한국영화에 없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카메라가 돌면 뭔가 웃기거나 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그냥 그 인물로 멈춰 있으면 좋은 순간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번호에 청춘스타에 관한 특집을 다루면서도 <레이스 짜는 여인>의 이자벨 위페르 생각이 났다. 청춘이라는 비밀스런 빛을 다룰 때는 정말로 그 빛에 주목해달라고 요구하고 싶어졌다. 충분히 아름다운 꽃 한 송이라면 배경에 다른 현란한 꽃단장을 안 해도 되는 게 아닐까. 화장하지 않는 연기, 덧칠없는 영화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P.S. 필자의 사정으로 ‘진중권의 이매진’을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와 다음주도 쉬게 됐다. 아울러 내부 사정상 이성욱 취재팀장이 출판사업부장 겸 <팝툰> 편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성욱의 현장기행’을 계속 할 수 없게 된 점, 양해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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