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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제임스 파커 혹은 애런 베이츠의 선택

오래전부터 추석은 한국영화의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4일 연휴라 극장가의 기대가 크고, 여름 동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때문에 몸을 사렸던 탓에 추석 연휴를 노리고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많다. 추석시즌을 겨냥한 한국영화 가운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벌써 ‘관객에게 드리는 글’을 내보내며 추석연휴까지 극장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호소를 했다. 추석이 끝난 뒤 누가 웃고 울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묻어두기 아까운 영화가 한편 있어 얘기를 꺼낸다. 방송다큐로 소개됐던 실화를 소재로 만든 <마이파더>는 대단한 미학적 야심은 없지만 대중영화로서 눈여겨볼 미덕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이야기만 들었을 때 <마이파더>는 기대할 게 별로 없는 영화 같았다. 입양아 애런 베이츠가 친부모를 만나고 싶어 한국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였다는 실화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게 뻔해 보였다. 사연은 기가 막히지만 결론은 보나마나라고 생각하며 극장에 들어간 나는 <마이파더>가 그런 예상과 다르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이파더>는 피로 맺어진 가족을 받아들이고 가족의 가치를 지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편견과 선입견을 깨트리는 어떤 선택에 관한 영화였다.

<너는 내 운명>처럼 교도소 면회실을 무대로 멜로드라마를 펼쳐 보이지만 <마이파더>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사랑이 전부가 아니다. 영화는 감정적 호소를 하는 동안에도 주인공 제임스가 맞닥뜨리는 정신적 혼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아버지가 살인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버지의 말을 믿었는데 거짓이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임스가 이런 일련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리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포와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하지만 그는 도피하는 대신 면회실에 앉아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남들이 그를 괴물이라 불러도 개의치 않고 괴물을 이해하고 껴안으려는 그 태도는 어린 시절 제임스가 처한 상황을 상기시킨다. 미국의 어느 백인 가정에 입양됐을 때 아이는 제 머리에 노란 페인트칠을 하며 그들과 나의 다름을 감추려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괴물로 여겨질까 두려워본 경험과 그를 괴물로 만들지 않은 양부의 사랑이 있었기에 제임스는 아버지를 괴물로 취급하지 않는다. 핏줄로 이어진 사랑을 특권화하지 않는 그런 태도가 사형반대운동에 나서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득한다. 제임스의 양부가 친부에게 “이렇게 멋진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전할 때, 우리는 제임스가 DNA 검사를 부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혈연에 구애받지 않는 사랑을 받은 제임스는 자신이 받은 것과 같은 것을 아버지에게 베푼다.

아마도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마이파더>의 뒷면엔 참혹하고 절망적인 <수취인불명>이 있을 것이다. 입양을 통해 양부모의 사랑을 받고 그만큼 베풀 수 있었던 <마이파더>의 제임스와 달리 <수취인불명>의 창국은 흑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기지촌 사람들로부터 차별받고 괴물 취급을 당한다. 온갖 비인간적 박해를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떠올린다면 지금도 우리 주변엔 수많은 창국이 존재한다. 제임스의 길을 갈 것인가, 창국의 길을 갈 것인가. 우리가 어떤 사랑을 베풀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 후세들은 제임스도 창국도 될 수 있다. 은연중에 <마이파더>는 우리의 미래를 만들 선택에 대해 묻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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