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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어떤 반성문

학교 다닐 때 반성문 한번 안 써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친구>에 나오듯 이삼십년 전 고등학교에선 뺨을 때리거나 몽둥이로 패는 비인간적 처벌이 대세였지만 맞고 나서도 반성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반성문을 쓰라는 이유는 짐작건대 너의 잘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기 위함이다.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 반성문을 쓰는 것은 어려울 게 없다. 자신에게 솔직할수록 문장도 매끄럽게 이어지게 마련이다. 반성문 하면 떠오르는 게 있는데 대학을 다닐 때 시위를 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일이다. 그때 경찰서에서 요구한 것은 반성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은 자신을 학교 선도부 선생님으로 착각하고 있었고 나는 선생님한테 혼나는 고등학생처럼 다소곳했다. 범법자와 공권력의 사이에 사실관계를 적는 조서가 아니라 반성문이라는 것이 개입된다는 것이 공과 사의 경계가 희미한 한국사회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양심수에게 전향서를 요구하는 것도 경찰이나 국가가 스스로를 부모나 교육자로 착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아무튼 반성문만 쓰면 풀려난다는 말에 펜을 잡았으나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 반성할 것이 없는데 그걸 글로 쓰자니 펜이 움직이기 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결국 쓰긴 썼다. 욱하는 심정으로 시위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시위참여로 경찰서에 잡혀온 걸 반성하고 있다는 말을. 꼼꼼히 읽어보면 시위에 참여한 걸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에 잡힌 것을 반성한다는 얘기인데 경찰은 문제 삼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도 아니고 경찰인데 그런 거 따질 여유가 없었으리라. 당연히 나는 그 일에 대해 그 뒤로도 한번도 반성한 적이 없다.

<문화일보>에서 신정아 누드사진 기사와 관련해 사과의 글을 실었다는 기사를 봤다. 기사를 보자마자 지금까지 사과하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싶어 놀랐지만 사과의 글은 한층 충격적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신씨의 얼굴과 발을 제외한 신체의 주요 부분을 가리고 선정성을 최소화하기 노력했습니다. 또 인터넷을 통한 무차별적인 사진 유포가 초래할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결과적으로 선정성 논란과 인권침해라는 비판이 제기된 데 대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 문구를 읽으면서 오래전 경찰서에서 내가 썼던 반성문이 떠올랐다. 반성하는 척만 하며 경찰에 잡힌 것을 억울해했던 나의 예전 반성문과 다를 바 없는 글이 아닌가. <문화일보>는 누드사진을 실어서 인권침해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인권침해라는 비판이 제기된 데 대하여 사과한다고 말한다. 이건 다시 말하자면 비판이 제기된 것이 문제일 뿐 비판의 원인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사과의 글은 분명 스스로 심각한 인권침해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놓고 이번 일을 반성의 기회로 삼겠다니 초등학생 반성문도 이렇게 쓰면 선생님한테 혼난다. 반성하지 않는 반성문. 눈 가리고 아옹하는 그런 글로 <문화일보>가 사과했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의 국어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차라리 <문화일보>는 사과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 모른다. 반성할 것이 없다면 그렇게 밝히고 한국에도 우리 같은 황색신문이 나올 때가 됐다고 선언하라. 논란이 되겠지만 그러면 위선의 탈을 쓰지 않은 언론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못한 것 없다고 생각하면서 쓰는 반성문은 아무리 좋게 봐도 일종의 거짓말이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신문은 인권을 침해한 신문만큼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