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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올해의 다큐 <할매꽃>

얼마 전 고경태 <한겨레> 매거진팀장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에 “가족을 심문해보자”고 쓴 적이 있다. 역사는 내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보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에서 낡은 사진첩과 글을 발견하고 생전에 물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배어난 글이었다. 살아계실 때 한번도 아버지의 젊은 날에 관한 얘기를 나눠보지 못한 나로선 심히 공감이 갔다. 역사가 교과서에 들어 있는 암기과목이라고 배웠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리라. 개인, 그것도 뛰어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내 가족의 과거에서 역사를 발견한다는 것은 이래저래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다. 고경태 팀장은 학교에서 부모 심층 인터뷰를 과제로 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는데 정말 그만큼 효과적인 역사교육이 어디 있을까 싶으면서도 한켠으로 걱정도 된다. 그렇게 파헤친 가족사에서 엄청난 비밀을 대면하면 어떻게 될까?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그랬던 것처럼 감당 못할 비극을 만나는 경우는 없을까? 우연히 접한 외갓집의 과거에서 근대사의 엄청난 비극을 들여다보게 되는 다큐멘터리 <할매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2주 전 정재혁 기자는 서울독립영화제 소개 기사에서 <할매꽃>을 ‘단연 올해의 다큐’라고 썼기에 궁금증이 일어 봤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행의 역사 앞에 누구라도 망연자실한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작은 외할아버지의 일기장이다. 작은 외할아버지는 칼로 부인을 죽이려 할 정도의 피해망상에 시달렸고 새벽 3시에 교회에 나가 종을 쳤으며 매일 일기장에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빼곡히 적었다. 감독은 작은 외할아버지의 정신이상이 공산당 활동을 하던 외할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갈 때 경찰이 공포탄을 쏘면서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형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그는 남은 일생을 제복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살아야 했다. 그렇게 끌려간 형은 고문을 받았고 빨치산 활동을 하던 어느 날 형수의 손에 끌려 산에서 내려왔다.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혼자 살아남게 된 뒤로 외할머니를 미워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탓이었으리라. 외할머니의 형제들 또한 전쟁과 분단의 희생자였다. 공산당 활동에 몸담았던 오빠는 자수하러 가던 길에 경찰인 친구의 총에 맞아 죽었고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간 동생은 조총련 활동을 한 탓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감독이 일본에 간 외할머니쪽 가족을 만나러 가는 대목에서 영화는 비극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조총련 활동을 하다 여동생(외할머니의 또 다른 동생)이 보고 싶어 1970년대 남한을 찾았던 외할머니의 동생은 박정희 정권의 체제 선전에 이용당하는 바람에 조총련에서도 배척당하고 만다. 그래도 북한 체제에 헌신적이었던 그는 자신의 딸을 북한에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의 아들은 여동생을 북한에 보낸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아들은 북한에 있는 여동생을 위해 지금도 일본에서 모멸과 가난의 나날을 견디고 있다.

더이상 기구할 수 없는 가족사. <할매꽃>은 그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딘 여인의 모습을 바라본다. 자신을 원망하며 술로 작파하던 남편에게, 정신질환으로 풍비박산난 작은 외할아버지의 가족에게, 공산주의자의 가족이라는 연좌제의 사슬에 괴로워하던 자손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던 외할머니. <할매꽃>은 부잣집 셋째딸로 태어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그녀를 위한 진혼곡이다. 사회과학의 통념이나 선악을 단정짓는 길로 끌리지 않고 그 자리에 외할머니의 초상을 그려놓은 것, 그것이 <할매꽃>의 좋은 점이다. ‘올해의 다큐’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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