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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서사의 위기

<쉬리>

<여고괴담>

이번호에 실린 연말결산 대담을 한 뒤로 ‘서사의 위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지금 한국영화가 처한 난처한 상황을 산업적 부실함이나 자본의 부족 또는 관객의 변화라고 말하는 대신 서사의 위기라고 부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중영화에서 무엇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전제를 수용한다면 한국영화와 관객 사이의 간극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부족한 데에서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흥행을 예상치 않았던 <식객>이 300만 관객을 불러모은 데 비해 기본 이상을 의심치 않았던 <두 얼굴의 여친>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요리를 소재로 삼은 영화 가운데 과거 흥행작이 없었던 반면 <두 얼굴의 여친>이 <엽기적인 그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사실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성공을 모방하는 영화가 실패하고 영화로 못 봤던 이야기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관객은 분명 오리지널리티 혹은 참신한 기획에 목마른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한국영화의 호황은 ‘새로움’이라는 외피를 쓰고 등장한 영화들로 시작했다. <쉬리>는 한국영화에서 처음 시도되는 대규모 총격액션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여고괴담>은 입시지옥의 현실을 장르의 무대로 옮겨오는 데 성공함으로써 70년대 이후 맥이 끊겼던 공포영화의 물꼬를 텄다. <엽기적인 그녀> 역시 한동안 생산되지 않던 코믹한 청춘영화로, 진부한 줄거리라는 평단의 반응이 무색하게 새롭다는 포장에 성공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사극에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실화를 다룬 액션영화에서, <친구>가 조폭영화에서, <괴물>이 괴수영화에서 이룬 성과들도 새로움에 기반한 것이며 <조폭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등 조폭코미디에서도 이런 특징은 유지된다. 물론 많은 경우 한국의 장르영화는 할리우드, 홍콩, 일본의 대중영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로맨틱코미디와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 조폭영화는 홍콩, 공포영화는 일본이 원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기획이 참신했던 건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기반이 황폐했던 탓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아버지의 영화가 없는 폐허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그러다보니 도전과 시도만으로도 관심을 끌 수 있었으리라. 전세계의 상업영화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작동되는 것이므로 이걸 두고 베끼기를 문제삼긴 어렵다. 적지 않은 영화가 할리우드에 리메이크 판권을 팔 정도로 한국영화는 외국의 장르영화 틀을 빌려오면서 지역적 변화를 가미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거의 모든 장르가 이런 식으로 성립된 다음이다. 이제 한국영화도 남을 베끼는 단계를 넘어서 스스로를 베끼는 단계로 접어든 것일까? 안이한 속편이나 과거 흥행작의 공식을 적용한 아류작이 많아지는 걸 보는 마음은 편치 않다. 우리는 지금 홍콩영화가 쇠퇴하던 시기에 봤던 일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호 특집기사로 세계 여러 나라의 흥행작을 돌아봤다. 할리우드영화의 지배력이 줄어드는 징조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지만 나라마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영화들이 흥행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자국영화 점유율은 한국보다 떨어지더라도 오히려 그래서 더 분투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얘길 하자는 건 아니고 함께 힘내자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껏 그랬듯 한국영화가 스스로 혁신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