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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무엇을 찍지 말 것인가?

<그림자 군단>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은 2차대전 때 프랑스에서 활약했던 레지스탕스 이야기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독립군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까. 이런 유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독일군이나 일본군에 잡혀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다. 적과 우리 편을 가르는 데 있어서 극악한 폭력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그림자 군단>에서 심금을 울린 대목 가운데 하나는 그런 장면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독일군에 잡혀 의자에 묶인 인물이 등장하고 막 고문을 시작하려는 찰나 장면은 전환된다. 잠시 뒤 얼굴에 피멍이 든 인물을 볼 수 있지만 결코 고문행위는 직접 묘사되지 않는다. 반면 이 영화는 레지스탕스가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돌리지 않고 지켜본다. 독일군의 지배에서 프랑스를 구한다는 대의명분이 무색하게 이 장면에서 레지스탕스는 마피아 같은 폭력조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 역시 살인자인 것이다. 상식적인 선악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이런 장면 연출은 중절모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멜빌 영화의 패션보다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비정한 세계를 견디려는 외로운 인물들은 그렇게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형체를 드러낸다.

야스밀라 즈바니치의 <그르바비차>는 ‘인종대청소’라 불리는 보스니아의 비극을 담은 이야기다. 12살 난 딸과 함께 사는 어머니가 딸의 수학여행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애처롭게 이어진다. 이번호 메신저토크에서 얘기한 대로 이 영화는 비극의 원점인 인종대청소의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너무도 끔찍해서 할 수만 있다면 언급조차 안 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신 영화는 지금도 계속되는 그날의 악몽을 어머니의 넋 나간 표정으로 간간이 드러낸다. 흔한 신체 접촉조차 그녀에겐 벌벌 떨리는 공포로 다가오고, 희미하게 다가온 사랑도 남성의 폭력 앞에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과거의 사건을 박제하거나 전시하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비극에 주목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연출이다. 우리에게도 80년 광주를 이렇게 그린 영화가 있었던가?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루마니아의 독재자를 몰아낸 혁명으로부터 16년이 지난 다음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혁명 당시) 그때 거기 있었는가를 묻는 직설적인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혁명의 잔재가 될 만한 그 무엇도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 세명의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은 혁명 같은 거창한 사건과 하등 관계없어 보이고 토크쇼에서 그들이 혁명에 관해 증언할 때도 배경 사진엔 텅 빈 도시 광장만 보인다. 혁명을 다룬 영화 맞나 싶을 정도인데 영화는 그래서 오히려 흥미로워진다. 요즘 유행이라며 들고 찍기를 시도하려는 카메라맨을 향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카메라를 삼각대에 올려놓으라는 이 영화의 일갈은 뼈있는 농담이다. 유행 따라, 남들 하는 대로 거대 서사의 진창에 빠져들지 않고 자신이 보여줄 것에만 집중하는 태도가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통렬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무엇을 찍고 무엇을 찍지 않을 것인가는 중요한 선택이다. 찍을 장면을 고민하는 만큼 찍지 않을 장면을 잘 선택한 영화가 많았으면 좋겠다. 부디 2008년 한국영화가 그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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