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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최후의 증인>

오랜만에 서울아트시네마가 북적거린다고 한다. 아벨 페라라, 프랑수아 트뤼포 등의 작품을 상영하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관객의 발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제에서 내가 꼭 봐야지 하고 벼르던 영화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이다. 이미 박찬욱 감독이나 오승욱 감독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던 <최후의 증인>은 1980년 개봉 당시 검열로 만신창이가 됐던 영화다. 2시간30분이 넘는 영화를 1시간40분으로 1시간가량 잘라내고 개봉했으니 당대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을 리 만무하다. 다행히 감독판이 남아 있어 그걸 본 몇몇 사람이 입소문을 냈고 2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 우리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체 어떤 영화기에 전설이 됐을까 너무나 궁금했다. 보고나니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최후의 증인>을 보면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떠올랐다. 4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을 용납할 수 없던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1984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139분으로 줄여 개봉했다. 관객은 스토리가 연결되지 않는다고 불평했고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영화는 결국 감독의 의도를 살린 229분으로 비디오 출시를 하면서 재평가를 받았고 뒤늦게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상영시간에 얽힌 얘기만 비슷한 게 아니다. <최후의 증인>은 영화의 규모나 내용 면에서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비견될 만하다. 한국전쟁에 기원을 둔 이 비극은 음모와 배신, 사랑과 복수의 이야기를 종횡으로 엮고 있다. 상영시간 158분에 담은 압축적 서사가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기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코리아>라고 부제를 붙여도 좋을 듯하다. 물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신화적인 분위기와 달리 <최후의 증인>은 1970년대 말의 암울한 사회분위기를 노스탤지어에 기대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린다. 장르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이 사회비판적 의식은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감독의 말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가짜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자막은 영화의 엔딩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오롯이 가슴에 새겨진다.

<최후의 증인>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이 영화가 매우 어둡게 찍혔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오프닝에서 “이야기도 어둡고 영화도 어둡다”고 미리 경고하고 있는데 실제로 인공조명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이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 느낌이다. 나무들은 메마르고 공간은 황량하며 날씨는 비가 오거나 구름이 짙게 깔린 인상이다. 모두가 시대의 우울에 전염된 것일까. 영화의 정서와 화면의 질감이 이루는 조화가 스펙터클조차 볼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그걸 보노라니 지난호에 외신기자클럽에서 달시 파켓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최근 한국영화가 때깔이 좋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때깔이 기술적인 의미에 한정된 것이라면 <최후의 증인>은 때깔이 나쁜 영화다. 한마디로 <최후의 증인>은 때깔이 나빠서 좋은 영화다. 달시 파켓은 무뚝뚝한 영화평론가들이라면 때깔이 좋은 한국영화를 보며 이것이 한국영화가 활력을 잃어가는 징조라고 해석할 거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최후의 증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포장이 지나치게 잘된 나머지 사람 냄새가 안 나는 영화들”을 보다가 <최후의 증인>을 보니 오히려 눈이 맑아진 느낌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대작들이 많이 나왔다. 때깔 좋고 화려하며 대중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들. <최후의 증인>은 그런 요즘 영화들이 채워주지 못한 아쉬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최후의 증인>의 증인은 더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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