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SF영화는 나의 성냥이다
2001-03-06

“성냥공장을 만들고 싶어요.” 아주 오래된 신문인터뷰에 실렸던 어느 나라 ‘퍼스트 레이디’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누구였는지는 고사하고 얼마나 오래된 기사였는지, 어느 나라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성냥이라는 품목만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은 걸 보면, 한국이 일정 정도 2차산업을 일궈낸 다음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왜 그 성냥이 떠오른 걸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설경구씨가 친구 진희경씨가 개업한 가게에 축하선물로 들고간 팔각성냥통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저런 선물을 갖고 가는 사람도 있네, 싶었다. 그러니 주변머리 없고 유행에 뒤진 주인공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소품으로서 성공했구나, 그건 다음 생각이었다. 그래도 꼭 그 영화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한국영화의 최신유행 탓이 더 컸다. 블록버스터, SF, 그런 표제어로 지칭되는 유행 말이다. 약속이나 한듯, 큐브릭의 미래였던 2001년 벽두 충무로에는 대형 공상과학영화 프로젝트들이 일시에 떴다. 아주 오래 전부터 SF를 별러오다가 이제는 기술적 한계가 극복되어 뜻을 펼 수 있겠다고 하산한 이들도 있고, 그런 굴레가 어느 정도 벗겨진 상황에서 상상력이 그쪽으로 급팽창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벤트형 블록버스터가 아니면 도리어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할리우드식 발상이 토착화하는 최근 동향을 보며, 새로운 상품개발 차원에서 이쪽으로 차원이동을 해온 이들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호오를 밝히자면, 나는 공상과학이, 아니면 과학적 공상이 좋다. 수식 때문에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을 따돌리고 독주 발전하는 다종다기한 물리학과 유전공학 따위를 만만하게 반져내는 제조법이 우선 좋고, 과학과 철학이 한몸이었던 시대에 그랬듯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잘만하면 보기 즐겁다.

충무로 SF영화는 나 같은 관객을 위한 성냥 같은 것, 설비과잉의 염려가 없을 수는 없다. 단순한 수입대체효과를 넘는 밝은 불꽃 몇개를 기다리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