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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행복하냐”
2001-12-26

편집자

한때는 비틀스를 꿈꾸었지만, 이제는 초라한 밴드조차 와해돼 주인공은 고향인 온천도시 단란주점에서 생계를 잇는다. 벌거벗고 ‘광란’하던 취객은 그에게 너도 옷을 벗으라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이 체념하듯 벗은 알몸을 기타로 가리고 연주를 계속하는 장면은 이렇게 하면서도 음악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고등학교 시절 음악을 함께하던 친구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생활 속으로 들어간 이 친구의 질문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사니 “너 행복하냐”였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꿈에 대한 미련이 묻어 있기는 했다.

임순례 감독은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는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신세대 웨이터에게 차라리 다른 기술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떠돌이 밴드 생활이 그 역시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만. 함께하던 밴드의 동료들은 하나둘 떠나고, 어린 시절의 음악스승도 무너져 떠나고, 연주흉내만 겨우 배운 웨이터는 껍데기 음악으로 클럽 와이키키의 무대를 점령하고, 남은 것은 환멸뿐인가 싶을 때 영화는 이상한 출구 하나를 슬며시 보여준다.

고등학교 적 충주의 록스타였던 ‘첫사랑’은 지금 야채장사를 한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는 시댁에 빼앗기다시피 한 이 여자는 아직도 가슴이 답답하면 노래방을 찾아 혼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노래라는 옛꿈을 이따금 제 속에서 꺼내 들여다보는 이 장면은 남자주인공의 알몸연주장면의 대구처럼, “너 행복하냐”던 질문에 대한 쓸쓸한 대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주인공의 유랑과 귀향은 어쩌면 이 여자의 대리답변을 얻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인공의 음악에 합류한다면 여자는 행복해질 것인가.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거기에도 직접 답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시작할 뿐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명확한 답을 해줄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연주하고 노래할 뿐. 미래의 성취가 아니라, 노래한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라는 듯.

일부는 음악을 버렸고, 버리지 않은 이의 음악은 수난하는 이 영화에서 ‘음악’이란 표제어를 다른 형태의 꿈과 이상으로 바꾸어도 좋겠다. 그래도, 영화의 여운과 잔상은 오래 남는다. 초라한 삶이지만 그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심지에 붙은 불은 그렇게 진득하게 탄다. 그 불을 받아 안으며, 내게 묻는다. “너 행복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