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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
2002-01-17

우디 앨런이 아주 싫어하는 음악가인 바그너는 파렴치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돈을 빌려줘서 받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바그너는 돈을 떼먹고도 미안한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김현과 함께 한국 최고의 산문가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기꺼이 존경을 바치고 싶은 시인 김수영도 돈에 관해선 쫀쫀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여름날 그의 와이셔츠 주머니에 들어있는 지폐가 밖에서 환히 보이는데도(경험해본 사람은 알지만 거기에 돈 넣으면 아주 잘 보인다), 김수영은 커피값이나 술값을 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돈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예인 혹은 장인의 가치는 일상적 도덕성이나 상식적인 의미의 인간성과는 무관하다. 유태인인 우디 앨런이 바그너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의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나치스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말난 김에 좀더 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에 미쳐서 집안을 거덜낸 인간이며, 발자크는 귀족임을 가장하기 위해 귀족이 쓰는 ‘드’를 자기 이름에 끼워넣은 치졸한 사람이다. 돈 걱정 안하려고 20대에 돈 많은 과부를 빨리 소개해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여동생에게 쓴 사람도 발자크다. 한심한 그들은 그러나 모두 위대한 예술가였다.

감독이나 배우를 인터뷰하다 보면 재수없는 인간을 가끔 만나게 된다. 그래서 기사 쓸 때 아주 나쁘게 쓰고 싶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하지 못한다. 눈치가 보여서? 그런 점도 없진 않을 것이다. 혹은 당사자가 상처받을까봐? 그런 점도 아주 조금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는 그의 인간됨을 말하기 위해서 만나는 게 아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감독은 연출력으로 배우는 연기력으로 승부한다. 인간성이 아무리 더러워도, 그가 훌륭한 장인이라면 그렇게 쓸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한 명제를 나는 종종 잊는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저널리스트들은 잊는다. 그래서 예인들에게 공인 운운하며 공무원의 윤리를 은연중에 강요한다.(이것도 기막힌 아이러니다. 공무원 부패도가 세계적인 수준의 나라에서 공무원의 윤리가, 누구보다 자유로와야 할 예인들에게 강요된다).

그런데, 차인표가 한방 먹였다. 18쪽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사정은 이렇다. 차인표는 할리우드로부터 007 시리즈 20탄의 출연 제의를 받고 뛸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그 영화가 남북관계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출연 제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그 경위를 써서 자신의 팬클럽사이트에 올렸다. 그 글은 올들어 접한 글중에서 가장 뭉클하고 재미있었다. 직업의식이 바로 발동해, 그 글 전문을 싣기 위해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차인표는 ‘굳이 싣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정중히 거절했다. “아직 배우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배우가 그런 사안으로 지면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다”라는 게 이유였다.

별다른 첨언이 필요없을 것 같다. 한방 먹여준 ‘배우 차인표’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