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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즐거움
2002-03-29

편집장

‘질린다. 정신사납다. 다 까먹었다.’

이번주에 개봉하는 <촉산전>에 대한 영화평론가 박평식씨의 20자 평이다. <씨네21> 기자 가운데 다수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런데 그런 영화를 이렇게 대문짝만하게 소개하다니, 라고 의아해하실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세상에는 이구동성 혹은 만장일치의 호평 또는 혹평을 받는 영화도 있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영화도 있다. 당연하게도, 후자에 속하는 영화들이 훨씬 흥미롭다. 발견의 기쁨을 선사하는 영화들은 바로 장점을 자기 속에 깊이 감추고 있어 쉽게 눈에 띠지 않는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촉산전>을 보고난 날 밤 김봉석과 나는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찬사를 주고 받았다. 우리 둘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던 터라 우리는 더욱 신이 났다. 영화에 대해 말하고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순간의 쾌감은 그것이 아무리 얄팍한 것이라고 해도 포기하기 힘들다.

우리의 판단이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가. 그걸 증명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어떤 영화를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주관적이며, 어떤 시점에서도 최종적 판정이란 불가능하다. 이건 평자 개인의 독해력의 한계 뿐만 아니라, 시대적 한계 그리고 비평의 본질적 한계까지 따져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니 이런 자리에서 건드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어떤 순간에 어떤 영화는 직관적 확신을 준다. 이야기는 요령부득이고 캐릭터는 납덩어리 같지만 <촉산전>의 스펙터클에는 도저히 통제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한 장르에 매혹돼 평생을 살아온 장인의 광적인 집념이 한꺼분에 분출되는 순간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장엄하다. 그 아름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거나 동의하긴 힘들겠지만, 그건 이런 방식으로라도 말해질 가치가 있다.

장르가 아닌 감독 개인의 독자적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선 <촉산전>과 전혀 다르지만 <생활의 발견>이나 <복수는 나의 것>도 논쟁거리를 가득 담은 흥미로운 영화들이다. 이젠 국내외에서 그 작품성을 의심하는 것이 그걸 옹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만큼 든든한 작가적 명성을 얻은 홍상수 감독의 신작 <생활의 발견>은 전작들과는 확실히 다른 논점을 제기한다. 아마도 홍상수론은 다시 씌어져야 할 것 같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엄청난 대중적 성공을 뒤로 하고 불온하고 불길한 악마의 세상으로 뛰어든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또한 명료한 정리를 허용하지 않는 문제작이다.

어느쪽이거나 논쟁적인 영화들이 많은 건 구경꾼으로서도 잡지쟁이로서도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