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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생활이 사치가 되어버렸네
노덕(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7-01-19

20살 초반 도쿄에 잠시 머문 적 있다. 당시 일본은 높은 물가의 상징이라 가기 전부터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겁을 먹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일단 차원이 다른 교통비를 만나고 기함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집안에 무역업을 하는 어르신이 계셔 무료로 숙식이 가능해 진행한 체류 일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잠잘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집 안에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쓰면서 생활할까가 가장 큰 화두였다. 내가 쓴 방법은 너무 상식적인, ‘꼭 해야 할 것, 꼭 하고 싶은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최대한 아낀다’였다. 그러다보니 마트 폐장시간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순간이었다. 떨이 초밥들, 유효기간이 임박한 유제품들, 하자가 있는 과일들을 집어와 하루 식량을 해결하는 식이었다. 당시엔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알뜰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유제품 천국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국에선 접할 수 없던 제빵제과류를 왜 한번쯤 먹어볼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나의 미련함을 탓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난 가난했다. 가난은 내 선택의 기준을 단순하게 바꿔놓았다. 포장이 그럴듯한 요거트, 당이 무첨가된 요거트, 가장 싼 요거트 중에서 난 언제나 가장 싼 요거트를 선택하거나 요거트를 사지 않았다. 내가 사치하지 않았다고 위안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일본에서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최근 대형마트에서 쇼핑하다 문득 카트에 담긴 내 물건들이 PB상품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PB상품을 선택한 이유는 일본에서의 경험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가격이 싼 이유도 있지만 사실 메이저 브랜드와 질적인 면에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만큼 메이저 브랜드를 신뢰하지 않고, 가격 차이만큼의 만족감을 얻지 못할 시 내가 억울할 거라는 이유도 있다.

PB상품이 처음 나왔을 때 그 가격 파괴가 기존 브랜드를 위협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 상태로 쭉 PB상품과 메이저 브랜드간의 가격 차이가 유지된다면 난 언제쯤 PB상품이 출시되기 이전의 브랜드들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 내가 사치하고 있지 않다는 감각으로, 죄책감 없이 선택하는 게 가능할까. 내가 천만 흥행감독이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도 같은 기능을 하는 상품을 두세배 값을 더 주고 사는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일상적으로 하려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난이 슬퍼지기 시작하는 순간은 가난 때문에 취향을 버려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에선 취향도 사치가 돼버렸을까. 언제 마지막으로 달걀을 사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먹지 않아도 살 만하기에 사지 않는다는 말은, 달걀이 취향이 돼버렸단 말과 같다. 먹지 않아도 살 만하니, 달걀을 살 때 아마 난 사치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얼마 전 발표된 신년 소비자 소매가격표를 보며, 지난해 대비 2배 폭등한 물가표를 보며, 그 일본보다 비싸다는 당근과 오이를 보며, 이 나라에서 취향을 넘어 생활이 사치가 된 사람은 과연 몇명일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