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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06

편집장

시사지를 들추다가 이인제씨가 god 공연장을 찾아 마이크를 잡고 “god가 세계를 제패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는 기사에 눈이 멈췄다. 그 기사의 제목은 ‘연예인을 공략하라’였다.

기분이 나빴다. 뒤이은 내용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이인제 고문의 god 콘서트장 방문에 가장 놀란 곳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진영이었다. god는 이 총재가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찜’해 놓았던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많은 배우, 가수, 개그맨의 이름과 이른바 대권후보 정치인들의 줄잇기로 채워져 있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나는 이인제씨나 이회창씨가 평소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고 특정한 기호나 소신을 밝혔다는 소식을 한번도 접한 적이 없다. 국회에서 <친구> 폭력성 시비가 일었을 때, 혹은 이재수의 ‘컴배콤’ 논란이 터졌을 때 대권후보들이 어떤 소신을 밝혔다는 소식을 접한 적도 없다. 그런데 이 무슨 수작들인가.

나는 대중문화를 알고 그것에 매혹된 정치인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 그래도 관계없다. 멋이 정치하는 건 아닐 테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아마 한국의 원로 정치인 중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보고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문화정책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는 주로 측근 정치인을 문화관광부 장관에 앉혔으며 지금 영화정책은 아주 나쁘게 변하고 있다.(이번호 20쪽에 관련기사가 있다. 문광부가 예산승인을 거부하며 내세운 “수익성이 없다”라는 문장과 이인제씨가 말한 “세계를 제패”라는 어구는 혈족처럼 보인다. 시장 가치만으로 문화를 대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세우는 한, 희망이 없다.)

그런데, 대중문화에는 관심도 애착도 없이 살다가 갑자기 표 필요할 때 되니까 ‘찜’이니 ‘공략’이니 하려드는 꼴은 정말 보기 싫다. 연예인은 홍어X이 아니다. 나는 연예인으로 통칭되는 대중문화 종사자들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으면 좋겠다. 천직을 잃지 않기 위해 혹은 먹고살기 위해 끌려다니는 걸 욕할 순 없다(조용필은 대중 앞에서 계속 노래하기 위해 5공화국에 끌려다녔다. 나는 그래도 그가 여전히 위대한 가수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아니라면 끌려다니지 않으면 좋겠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정치인들처럼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부류도 없다. 정당이 끼어들면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아예 영화계의 노무현씨 지지자들처럼 이쪽에서 먼저 지지하든가, 아니면 그쪽을 가능하면 멀리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몇년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이번호에 기사가 실렸다)의 밀고자 엘리아 카잔이 공로상을 받을 때 주위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치는데도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에드 해리스가, 당신들 때문에 고어가 낙선하고 부시가 당선됐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소수당인 녹색당을 변함없이 지지한 팀 로빈스와 수잔 서랜던이, 007 시리즈 출연이라는 대어를 ‘정치적 판단’으로 거절한 차인표가, 멋져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