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구조와 효과
2002-04-12

편집장

영화비평으로 묶여지는 글들의 대부분은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가 불러일으킨 심리적 파장에 대해서 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많은 영화비평은 대개 영화의 구조가 아니라, 영화의 효과를 말한다. 오로지 효과만을 말할 때, 그런 비평은 한때 인상비평으로 불렸다.

그런 비평이 좋은 비평이 안 되라는 법은 없다. 인상비평이란 말은 한동안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낡은 비평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됐지만, 여전히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자에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 내가 느꼈던 것을 어떻게 이렇게 잘 집어내 정확하게 표현했을까, 하는 즐거움을 주는 글은 좋은 비평이다. 따지고보면 감상도 비평도 결국 영화와의 대화이며 궁극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구조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영화들이 있다. 홍상수의 영화가 그런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대중영화들의 구조는 일정한 규칙과 관습에 따라 만들어지며, 비평이 그걸 매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다르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영화의 갖가지 요소들을 결합한다. 홍상수가 일상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허위의식과 추한 욕망을 드러낸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렇게만 말하고나면 너무 많은 영화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심지어 <아줌마> 같은 TV드라마도 포함된다. 홍상수 영화의 비밀은 그 구조에 있으며, 비평은 결국 그 구조와 대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 까다로운 숙제다. 어쩌면 저널리즘 비평에서 소화하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방식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층위에서 새로우며, 그 새로움은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하나씩 뜯어보기 전에는 전모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언어라는 도구로 아무리 뜯어내려 해도 다 뜯겨지지 않는 과잉의 예술이다. 아무리 많이 말해도 영화는 항상 말해진 것보다 많다. 홍상수는 과잉의 힘을 가장 잘 이용하는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의 영화의 구조 속에 들어간다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이번호 특집으로 실은 원고지 100매 분량의 정성일씨의 <생활의 발견> 비평은 그 엄두가 안 나는 일을 감행한 글이다. 그 분량과 분석의 강도에서 대중적 영화지에 별로 어울리지 않을 글이다. 정성일씨는 매 신의 숏의 길이를 초 단위까지 재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홍상수 영화의 구조를 탐색해 들어간다. 어느 대목에서도 가치판단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각 영화적 요소들이 어떻게 만나고 부딪히고 미끌어지는지 꼼꼼히 따진다.

이 글은 단숨에 읽히지 않는다. 형식에서도 <생활의 발견>의 구조를 전용한 이 글을 읽는 일은 기꺼이 미로 찾기에 동참하는 일이다. 머리가 아플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구조와 대면하기 위해선 그런 수고로움이 불가피하다. <생활의 발견>에 관한 많은 비평이 있었고, 이제 이런 비평이 나와야 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