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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편집장] 이명세, 영화 없이는 못 살아
주성철 2017-12-01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여러분의 사랑 속에서 쏙쏙 자라나는 여러분의 귀염둥이, 늘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종세, 이종세 인사드립니다.” 이명세 감독의 데뷔작 <개그맨>(1988)에서 스스로 천재라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삼류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안성기)는 언제나 그렇게 인사를 시작한다. 이후 영화배우를 꿈꾸는 변두리 이발소 주인 문도석(배창호)과 가수를 꿈꾸는 오선영(황신혜)과 만난 그는 함께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우연히 탈영병에게서 진짜 총을 얻은 종세 일행은 제작비 마련을 위해 은행을 털고, 도피행각 끝에 자신들을 알아보는 자동차 수리공마저 총으로 쏘게 된다. 1974년 M1 카빈 소총을 탈취하여 여러 건의 강도, 살인을 저지르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이종대, 문도석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개그맨>에서 안성기는 이종대와 이명세가 결합한 이종세를 연기했다. 혹시나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스포일러를 쓸 수 없지만, 데뷔작에서부터 그에게 영화란 말 그대로 ‘꿈’ 그 자체였다.

물론 이 사건은 당대 다른 여러 작품들에 영향을 끼쳤다. 최인호 작가는 <지구인>을 썼고, 그를 바탕으로 이장호 감독은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1982)를 만들었다. TV드라마 <수사반장>에서도 이 사건이 영상화되어 배우 박근형이 이종대를 연기했고, <강남 1970>(2015)에서 이민호가 연기한 김종대도 이종대로부터 온 이름이다. 아무튼 이명세 감독은 언젠가 걸작을 만들고야 말리라는 주인공에게 이제 막 데뷔작을 만드는 자신의 이름을 겹쳐놓고, 찰리 채플린 분장을 시켜서는 이종세라는 주인공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후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남자는 괴로워>(1995),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M>(2007) 등을 만들며 그는 당대 최고의 표현주의 감독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진정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를 이어갔다.

여러 감독들이 출연하여 저마다 한편씩의 단편영화를 연출해 선보이는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서(<씨네21> 1131호 씨네인터뷰, ‘TV예능으로 간 감독들-임필성, 이원석’ 참조), 드디어 가장 선배인 이명세 감독의 작품 <그대 없이는 못 살아>와 메이킹 필름이 공개됐다. 한때 한국영화계를 주름잡던 그였지만 5년 전 <미스터 K>를 연출하다가 도중하차했던(이후 2013년 이승준 감독이 <스파이>라는 제목으로 최종 완성하여 개봉했다) 기억은 ‘중견감독과 대기업의 대결’ 구도 안에서 감독이 별다른 힘을 쓸 수 없었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그는 꽤 긴 시간을 공백으로 보냈다. 그런데 “레디, 액션!”을 큰소리로 외치는 감독들이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는 요즘 촬영현장에서 거의 온몸을 내던져 현장을 지휘하는 그의 모습에 후배 감독들은 눈물을 훔쳤다. 나 또한 한참 어린 콘티 작가나 스탭들에게 온갖 의성어를 써가며 스토리텔링만큼이나 중요하게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는 그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던”이라는 또 다른 출연자 이경미 감독의 얘기에 적극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우 형사(박중훈)와 짱구(박상면)가 탱고 리듬에 맞춰 옥상에서 전혀 싸움 같지 않은, 오직 그들의 그림자로 싸우던 옥상 액션 신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대 없이는 못 살아>에서도 그 그림자 액션이 등장했다. 역시 또 다른 출연자인 양익준 감독의 말처럼 “말이 되는 이야기”만을 따지는 당대 한국영화계에서 한동안 소외돼 있던 그는 얼마나 현장이 그리웠을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개봉 당시 그는 중국 5세대니 6세대니 하는 비평적 잣대에 빗대어, 국경을 초월해 이미지와 스토리 등 영화를 둘러싼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영화 1세대’ 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포부에 값하는 길을 걸어왔다. 이종세의 꿈처럼 이명세의 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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