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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블랙 뷰티
김혜리 2018-02-28

※<블랙팬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블랙팬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마블 유니버스에 신대륙을 더했다. <블랙팬서>에서 인물의 동기는 액션의 핑계를 넘어 실제 세계의 이슈와 직결된다. 와칸다인의 패션과 문화도 어슷비슷한 마블 히어로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와칸다의 다섯 부족이 모여 티찰라(채드윅 보스먼)의 즉위를 결정하는 의식은 <블랙팬서>의 첫 정점이다. 얼핏 클리셰 같지만 의식은 합리적이고 의미심장하다. 후계자는 블랙팬서의 초능력을 빼고도 왕의 자격이 있는지 시험받고, 도전 기회는 모든 부족에 개방된다. 신성한 결투장의 경계를 짓는 것은 대자연, 폭포와 절벽이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성장한 부족 대표들은 특정인의 생사를 떠나, 장쾌한 노래와 춤으로 새 시대를 기념한다. <블랙팬서>는 “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흑인이기에” 멋진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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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펙 감독의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삶에 대한 작가 제임스 볼드윈(1924~87)의 사유를 영상으로 옮긴 뜨거운 에세이 필름이다. 내레이션으로 읽히는 볼드윈의 유려한 문장, 과거와 현재의 검은 분노를 하나의 강물처럼 이어주는 편집이 이 다큐멘터리를 에세이로 만든다. 1979년 제임스 볼드윈은 세명의 동시대인 메드거 에버스,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통해 민권운동 시대의 내러티브를 써내려고 시도했다. 세 인물은 볼드윈보다 젊었으나 하나같이 마흔 전에 죽음을 맞아 볼드윈은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을 짊어지게 됐다. <리멤버 디스 하우스>라는 제목을 붙였던 책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제임스 볼드윈이 문제 삼는 당대 미국 흑인의 중요한 곤경 중 하나는 정체성의 부정이다. 백인 영웅만 활약하는 TV, 영화를 보고 자라는 아프리카계 어린이들은 거울 앞에서 혼란을 겪는다.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디폴트값의 인간, 이른바 ‘정상인’이 흰 피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킹콩>을 관람하는 어린이들은 영화 속 어두운 피부를 가진 인물들에게서 개인이 아니라 몰려다니는 야만인 무리만 본다. 제임스 볼드윈은 잘 알려진 영화와 시드니 포이티어 같은 스타뿐 아니라 지금은 잊힌 영화들도 풍부하게 예로 든다. 라울 펙 감독은 당연히 언급된 영화 속 적절한 장면을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에 불러낸다. 소년 시절 볼드윈은, 주인공이 다른 노예들의 저항을 만류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1927)을 보고 자신의 손으로 악을 청산하지 않는 톰 아저씨는 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소년에게 영웅은 직접 복수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럴 수 있는 영화 속 모든 영웅은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수갑에 묶여 탈출한 흑백 죄수의 우정을 그린 <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 역시, 백인의 죄책감(White Guilty)을 영화를 통해 대리해소하려는 시도다. 볼드윈은 극중 시드니 포이티어가 기차에 올라타지 못한 토니 커티스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뛰어내릴 때 백인 관객이 “그래 우리가 실수로 해를 끼쳤지만 흑인들은 우리를 증오하지는 않아”라고 안도한다고 썼다. 자기들의 죄의식을 덜기 위해 흑인이 관대하고 선하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유색인 화장실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백인이 나오는 <히든 피겨스>에서 보듯, 인종주의는 공격적 차별과 억압뿐 아니라 무지로 강고해졌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유색인과 접촉이 없고 어떤 삶을 영위하는지 무지하기에 백인 아닌 동료시민의 고난을 이해하는 데에 무능하고 타자화는 계속된다. 예컨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위로했던 흑인 노예의 춤과 노래를 보고 “살 만했나보다”라고 짐작하는 식이다. “궁극적으로 이 나라는 흑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 인구의 1/9인 흑인을 미국이 보호하고 시혜를 베풀어야 할 집단이 아니라 건국의 당사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볼드윈은 단언한다. 영화 속에서 볼드윈의 문장을 내레이션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새뮤얼 L. 잭슨이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멋 부린 평소 말투는 간데없고 줄곧 담백하고 나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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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팬서>의 히어로 티찰라(채드윅 보스먼)와 악당 킬몽거(마이클 B. 조던)는 똑같은 슈트를 입는다. 히어로와 적이 한 동전의 양면임을 이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줄 방법은 별로 없을 터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각본에도 참여한 <블랙팬서>는, 식민지배의 흉터 없이 자랑스러운 전통을 보존하며 번영한 가상 국가 와칸다와 착취와 차별로 고통받아온 미국의 아프리칸 디아스포라에 양발을 나눠 디딤으로써 균형을 잡는다. 백인과 맺는 관계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흑인의 정체성이 저울의 한쪽이고, 백인을 고려하지 않은 “본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머지 한쪽에 올려진다. 고립 속에 번영한 아프리카 국가의 왕자로 귀하게 자라 왕이 된 티찰라는 수많은 아프리카계 인구가 여전히 고통받고 그 고통이 어느 때보다 전 지구적으로 직결된 세계에서, 와칸다의 국가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반면 미국 오클랜드의 흑인 커뮤니티에서 차별을 겪으며, 미국의 패권주의를 해외에서 실행하는 비밀요원으로 훈련된 킬몽거에게 답은 자명하다. 불평등과 압제를 해소할 길은 오직 무기이고, 와칸다는 전세계 아프리카계인의 병기창이 될 수 있다. 마블을 포함해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장르의 약점은 잘 알려져있듯이 제3막의 상투성과 허무맹랑한 악역인데 <블랙팬서>는 적어도 후자는 깨끗이 날려버렸다. 마이클 B. 조던의 카리스마가 완성시킨 킬몽거는 그저 순수한 악의와 파괴력으로 똘똘 뭉친 우주에서 온 보랏빛 빌런과 부류가 다르다. 실제 미국사에서 블랙팬서당이 취했던 입장과 가까운 킬몽거의 주장은 일리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이상을 포함해 모든 것을 상속받은 티찰라의 신념보다 관객의 마음을 끈다. 미국인으로 살아온 킬몽거는 굴욕을 맛본 적 없는 와칸다의 직계조상이 아니라 미국으로 끌려가던 노예선에서 뛰어내린 아프리카인을 선조로 삼는다. 그는 패하고도 개과천선의 형식으로 신념을 버리지 않으며, 어디에 묻히느냐를 중시하는 와칸다의 문화를 조소하듯 탈출 노예처럼 수장되길 원한다. 단적으로, 킬몽거는 티찰라 대신 블랙팬서가 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악역이다. 수년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고 악역으로 꼽혀온 로키(톰 히들스턴)가 홀을 넘길 때가 됐다. 그리하여 <블랙팬서>의 투쟁은 흥미진진하다. 와칸다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막연한 세계 종말을 막으려는 힘겨루기가 아니라 특정한 개인, 가족, 국가, 역사에 관한 논쟁이기 때문이다. 클라이맥스의 혼란스러운 CG 과다복용은 <블랙팬서>도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우리는 싸우는 모든 인물의 명분과 동기를 이해하고 전황을 따라갈 수 있다. 이름도 혼동되는 마법의 돌 때문에 몰려든 외계인들과의 전면전과는 몰입도가 다르다. 물론 <블랙팬서>에도 비브라늄이라는 맥거핀이 등장하지만, 티찰라와 킬몽거의 갈등은 비브라늄 없이도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심지어 마블 우주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블랙팬서>는- 쿠키영상만 빼면- 충분히 영화로서 성립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열여덟 번째 엔트리라기보다 새로운 유니버스가 통째로 더해진 기분으로 극장을 나섰다. (계속)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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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때 처음 두세번 밥을 사면 그 모임에서 ‘늘 내는 사람’으로 각인된다. 프로덕션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에 극중 세계를 확실히 제시하면 실제보다 더 큰 예산과 자원이 투입된 것처럼 보인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예산이 1900만달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사람들에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들려준 ‘생활의 지혜’다. 영화가 시작되는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아파트는 관계의 긴밀함을 보여주듯 친구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의 옆집과 하나의 창문을 공유하고 있다. 창틀의 모양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 영감을 준 작품 중 하나인 <분홍신>에서 가져왔다. 나란한 아파트임에도 엘라이자의 집은 깊은 물의 색깔인 청록이 주조이고, 그림을 그리는 자일스의 아파트는 볕이 잘 들어 따뜻한 호박색 톤이다. 한편 엘라이자의 집 아래층은 철 지난 뮤지컬과 고전을 동시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엘라이자는 영화로부터 새어나오는 음향과 빛 속에서 매일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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