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한창호의 트립 투 유럽
[트립 투 이탈리아] 이탈리아 전국 투어와 영화

사람 풍경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에서는 시칠리아 출신의 아버지(오른쪽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육지에 사는 다섯 자식을 만나러 떠난다.

외국인들이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에 들어갈 때는 크게 두 방향이 이용된다. 먼저 영국의 마이클 윈터보텀이 <트립 투 이탈리아>(2015)에서 보여준 서쪽인데, 토리노에서 시작하여 제노바, 토스카나 지역, 로마 그리고 나폴리와 카프리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탈리아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것인데, 이 여정은 영국 또는 프랑스쪽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에서 보여준 동쪽인데, 알프스 아래의 티롤 지역, 베네치아, 가르다(Garda) 호수, 로마, 나폴리 그리고 시칠리아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탈리아의 동쪽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것으로, 독일쪽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지금도 동이든 서든 거의 빠지지 않는 도시는 피렌체, 로마, 나폴리이고, 여정에 따라 북부 지역에선 서쪽의 토리노와 제노바, 동쪽의 베네치아, 그리고 가운데의 밀라노가 강조되는 식이다. 이들 도시들이 이탈리아 기행의 가장 인기 있는 목적지들이다. 그런데 이런 여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경험이 지역마다 약간씩 다른 사람들에 대한 풍경일 것이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로마 에피소드 장면.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와 소피아 로렌이 커플로 나온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이탈리아 인류학 입문’

비토리오 데시카는 로마, 나폴리, 밀라노 세 도시를 선정하여, ‘이탈리아 인류학 입문’ 같은 작품을 내놓는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1963)이 바로 그 작품인데, 세 도시에서 진행되는 세개의 로맨틱 코미디를 묶어놓았다. 먼저 나폴리의 커플(세곳 모두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소피아 로렌이 주연한다)은 도시의 하층민들이 몰려 사는 곳에서, 아내의 담배 밀매로 겨우 살고 있다(나폴리는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어서 ‘국제시장’처럼 미제 상품들이 흘러나오곤 했다). 이들은 경찰이 부과한 벌금을 내지 못해 결국 아내가 감옥에 가게 됐는데, 당시의 법에 따르면 임신부는 수형을 연기할 수 있었다. 코미디의 골격은 이들 커플이 감옥행을 연기하기 위해 계속 임신을 하는 데 맞춰 있다. 커플 모두 배우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지금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데, 생계를 책임진 아내가 감옥행이라니, 무조건 연기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낳은 아이가 7남매다.

밀라노 편은 도시의 ‘특성에 맞게’ 부잣집 부인과 지식인 남자 사이의 ‘일탈’을 다룬다. 모피를 걸친 여성은 롤스로이스를 타고, 도로교통법을 깡그리 무시하며 제멋대로 운전을 한다. 사람들은 차가 무서워 그냥 피해준다. 남자는 밀라노 근교에서 소형차인 ‘친퀘첸토’를 타고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이 롤스로이스를 타고 밀라노 인근을 드라이브하는 게 주요한 내용이다. 여성은 지식과 문화, 그리고 세련된 교양을 찬양하며,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남자가 운전하던 중 교통사고가 나서 명품 롤스로이스의 앞부분이 찌그러지고 말았다. 화가 난 여성은 돌변하여 남자를 길 한가운데 버려두고, 붉은 페라리를 타고 지나가던 다른 남자의 차에 올라, 혼자 밀라노로 돌아가버린다. 밀라노의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 그리고 일탈의 관계가 강조된 셈인데, 데시카는 ‘아프게도’ 이 에피소드를 ‘이탈리아의 오늘’로 봤다.

‘내일’은 로마에서 펼쳐진다. 남자는 볼로냐 출신의 세일즈맨이고, 여성은 소수 고객과 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는 사실상의 매춘부다. 여성은 로마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이 내려다 보이는 조그만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편 이웃엔 신부 준비과정에 있는 청년이 있는데, 그만 여성에게 반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할 참이다. 로마 배경 영화이면 종종 등장하는 ‘흔들리는’ 신부, 어느덧 이웃이 돼버린 ‘아름다운’ 매춘부,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찌질한’ 아들이 ‘이탈리아의 내일’을 구성하고 있다.

데시카는 나폴리에서 열정을, 밀라노에서 위선을, 그리고 로마에서 방황을 읽은 셈이다.

<우리는 그토록 사랑했네>는 고향이 다른 레지스탕스 출신 세 남자의 현실 적응기를 그린 영화다.

남부의 열정, 북부의 배금주의

1970, 80년대 이탈리아 정치 코미디의 대표 감독인 에토레 스콜라는 대략 10년이 지난 뒤, 데시카처럼 ‘사람들 풍경’을 그린다. <우리는 그토록 사랑했네>(1974)가 그 작품인데, 파시즘 시절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세 남자의 인생여정을 따라간다. 북부 파비아(Pavia) 출신 변호사, 로마 출신 간호보조사, 그리고 남부 노체라(Nocera) 출신 고교 철학교사가 그들이다. 셋 모두 레지스탕스 때는 전투적인 좌파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부의 철학교사는 고향의 지독한 보수주의에 맞서 더욱더 진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는데, 그는 물러서지 않고 이젠 극단주의로 치닫는 ‘열정적’인 혹은 ‘외고집’의 남성으로 변한다. 로마의 간호보조사는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다. 웬만하면 정식 간호사가 될 수 있는데, 번번이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다 손해를 보는 ‘순수한’ 남성으로 남는다. 그런데 북부의 변호사는 180도로 변한다. 심지어 파시스트 기업가의 사위가 되어, 동지들과도 멀어지고, 대신 큰 부를 쌓는다. 스콜라 감독도 데시카처럼 남부인에게선 열정 혹은 외고집을, 그리고 북부인에게선 배금주의의 위선을 읽은 것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1990)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사람 풍경을 읽는다. 시칠리아의 노인(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은 아내가 죽은 뒤, 다섯 자식을 찾아 육지로 여행에 나선다. 흥미로운 점은 자식들은 시칠리아 출신인데, 어느덧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사람들을 조금씩 닮아간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사랑했네>의 남부처럼, 나폴리의 완강한 보수주의에 맞서다보니 점점 더 전투적으로 변해갔고, 그래서 점점 더 고립된 아들이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들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로마의 아들 카니오(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주인공)는 ‘로마답게’ 정치 지망생이다. 진보정당 의원의 보좌관인 그는 부친 앞에서는 마치 자신이 당내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는 듯 허세를 떤다. 피렌체의 딸 토스카(푸치니의 <토스카> 주인공)는 패션계에서 일한다. 자신을 디자이너 겸 모델이라고 부친 앞에서 자랑했지만, 사실은 속옷 모델 활동을 가끔 하는 변변치 못한 처지다. ‘선의의 거짓말’은 부친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 밀라노의 아들 굴리엘모(로시니의 <윌리엄 텔> 주인공의 이탈리아식 이름)는 라스칼라 오케스트라의 큰북 연주자다. 아들 가족은 이미 붕괴돼 있고, 10대 손자는 여자친구를 임신시켜 고민 중이다. 끝으로 토리노의 딸 노르마(벨리니의 <노르마> 주인공)는 통신공사에서 일한다. 역시 선의의 거짓말을 하여 자신은 간부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평범한 전보 담당 직원이다.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이혼한 지는 제법 됐다.

토르나토레는 도시의 특성을 자식들의 직업으로 보여준다. 나폴리와 관료주의, 로마와 정치, 피렌체와 패션, 밀라노와 음악, 그리고 토리노와 첨단산업이다. 나폴리의 아들은 고립된 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나머지 자식들도 부친의 기대와는 매우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부친은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 부모들처럼 사실은 자식들에게 많이 실망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뒤, 고향의 아내 무덤 앞에서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라며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실상은 기대 이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르나토레는 ‘잘 지낸다’고 말하는 낙관주의, 혹은 선의의 거짓말을 이탈리아 전체에 대한 ‘씁쓸한’ 풍경으로 읽고 있는 셈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