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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쓰고 또 쓰는 수밖에 없다
권김현영(여성학자)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8-03-22

한국 여성들이 나혜석을 알게 되는 순간은 대체로 비슷하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 누군가가 나혜석이라는 이름을 말해준다. ‘나혜석 콤플렉스’라는 복합 고유명사를 눈앞에 흔들며 이혼 후에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그의 비극적 삶을 굳이 귀에 대고 들려준다. 나에게 그 얘기를 해준 건 대학 선배였다. 토론에서 밀리자 “똑똑한 여자, 인기 없어”라고 말하던 이였다. 나는 그의 말을 20년째 곱씹으면서 한심해 하고 있지만, 나혜석을 알려준 건 고마웠다. 페미니스트인 나에게 나혜석은 죽음의 주인공이 아니라 삶의 주인공이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글로 써내려고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늘 감탄한다. 국문학자 장영은은 나혜석의 불행과 몰락이 이혼 때문이 아니라 이혼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혼백서 발표 이후 나혜석은 글을 실을 곳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아무도 대신해서 말해주지 않는 식민지 여성 지식인에게 지면에서의 배제는 곧 존재의 삭제와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국문학자 손유경은 식민지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구조를 조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폄훼되었던 식민지 여성 작가 지하련과 최정희의 자전적 글쓰기를 재조명한다. 식민지 시기 여성들이 넘어서야 할 산은 제도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오빠이며 애인이었다. 손유경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녀들의 소설은 신변과 개인사를 다루었기에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넘어서려던 경계가 매번 인간의 얼굴을 띠고 있기에 더 큰 고통을 받았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내 생각도 같다. 이것이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억압에 대해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던 이유다. 여자들이 자신이 겪은 문제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내면 내부총질하지 말라, 공작정치에 이용당하지 말라는 성마른 충고를 힘주어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여자의 전쟁은 언제나 내전이었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가족과 애인이, 신뢰하는 동료가, 여전히 충성심이 남아 있는 공동체 안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하는 가해자다. 미국의 흑인 여성운동가 프랜시스 빌은 흑인 남성들이 원한 해방은 백인 남성들만 누린 남성적 특권이었는데, 그 특권은 바로 흑인 여성의 몸에 대한 ‘프리패스권’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흑인 여성으로서의 해방은 이중의 모순 속에서 반드시 내전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소위 ‘진보진영’에서 집중적으로 미투(#MeToo)가 나오는 이유는 진보진영 남성들이 남성 권력에 대항하지 않고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지지하거나,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반성이 먼저 아닐까?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100년 전 선배들이 하던 것처럼 여성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또 내고, 쓰고 또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마침 우리 한국 여성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읽고 쓰기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무기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