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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편집장] 창간 23주년 기념호, 글자가 커졌습니다
주성철 2018-04-06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 그랬어요”라고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가 말했다. 그는 별것 아닌 일로 문제 삼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식으로 한 얘기였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우리는 최근 끊임없이 문제 삼는 사람들이 거둔 성과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 최근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오상진과 함께 <기억의 밤>과 <사라진 밤> 두편의 한국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 있다. “그냥 바로 처단하면 되는데, 왜 저렇게 기다려주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농담 섞인 얘기에 무릎을 탁 쳤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사실이 있음에도 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가해자가 기어이 스스로 알아차리게끔 오히려 피해자가 갖은 노력으로 기다려주는 걸 보면서 “한국영화가 가해자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것 아니냐”고 무심히 건넨 그 얘기가 어쩌면 백번 옳은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두 영화에서는 긴장감을 자아내게끔 하는 가장 중요한 영화적 장치이지만, 뒤집어 그렇게 해석해보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창간기념호 첫 번째 기획으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난 것도, 지금의 미투(#MeToo) 보도를 지속해 나가겠다는 의지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진선미 의원은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환경, 생태, 여성, 소수자, 군 인권 등 여러 문제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보여왔고, 최근 <씨네21>의 미투 보도(이현주·조근현 감독, 김영빈 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위원장, 제작자 안동규)와 함께했으며, 미투 피해자보호법과 영화계 미투 방지법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돌이켜보니, <씨네21> 입사 이래 이처럼 힘들었던 때가 있었나 싶다. 보도한 기사의 ‘팩트 체크’에 대해 따져 묻는 항의글이 가장 많은데, 당연히 팩트 체크가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을 취재해서 기사로 공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감안하여 상황의 신빙성, 진술의 일관성 등을 치밀하게 따져 우리가 믿는 입장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CCTV 영상이나 녹취 파일도 없는 세상 그 모든 사건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창간기념호인데 특집에 대한 얘기는 하고 글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세계 영화사의 걸작 리스트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감독들의 첫머리에 꼽히는 작품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영화인들이 영감을 고백하는 작품의 명단으로서 ‘레퍼런스 100’을 선정해 2주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수십편의 영화를 기자들이 저마다 가져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별하고 명쾌한 기준이 있었다기보다, 어떤 새로운 접근법 혹은 발견의 기록이라 봐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 더! <씨네21> 23년 역사상 처음으로 글자 크기를 키우기로 했다. 원고량을 줄이기 위한 꼼수도 아니고, 눈이 침침한 직원들의 노쇠화에 따른 시력 문제를 감안한 것도 아니다, 라고 쓰고 보니 그런 이유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건, 행간과 자간을 새로 만지고 글자를 키워 가독성을 보다 높였다. 앞으로 쭉 보다 시원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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