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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경사기도권] <더 포스트>를 보며 다시 생각한다, 영화가 사랑한 악당 닉슨에 대하여
허지웅(작가) 2018-04-16

닉슨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를 보다가 리처드 닉슨에 대해 다시 떠올렸다. 닉슨은 언제나 흥미롭다. 아무런 자산 없이 노력과 좌절 끝에 혼자 힘으로 최고 권력의 중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특유의 피해의식과 적을 대하는 방식 때문에 임기가 계속될수록 괴물이 되어갔다. 그는 자신이 받아 마땅한 사랑과 보상을 빼앗겼으며, 이는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자신에 관련된 가능한 세상의 모든 대화를 녹음하고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공작과 거짓말을 반복했다.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 이어졌다.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했다.

닉슨은 미국 대중문화의 유력한 캐릭터 중 하나다. 닉슨을 다소 입체적으로 다룬 올리버 스톤의 <닉슨>이나 론 하워드의 <프로스트 VS 닉슨> 정도를 제외하면, 영화 속의 그는 언제나 악당이었다. 역사의 평가가 이미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닉슨이 직접 등장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수많은 영화들이 그가 남긴 유산의 자장 위에 만들어졌다. 멀게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부터, <대통령을 죽여라>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엘비스와 대통령> <프로스트 VS 닉슨> <왓치맨> <J. 에드가> <더 포스트> <마크 펠트: 백악관을 무너뜨린 남자>, 그리고 올리버 스톤의 <닉슨>에 이르기까지. 역설적이게도, 닉슨은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한 실존 인물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이 가운데 <J. 에드가>와 <더 포스트>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마크 펠트: 백악관을 무너뜨린 남자>, 마지막으로 <닉슨>을 순서대로 보길 추천한다).

리처드 닉슨은 언제나 자신이 케네디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당대의 평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그의 생각에 자신은 자수성가한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 반면 케네디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반칙왕이었다.

그는 케네디를 증오했다. 케네디는 하버드를 나왔다. 성적은 미달이었으나 훌륭한 가문 덕분에 하버드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닉슨 또한 하버드에 합격했다.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가지 못했다. 그는 등록금이 없었다. 가문의 신용이 바닥이라 빌릴 수도 없었다.

심지어 케네디는 잘생겼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할 줄 아는 능력도 출중했다. 닉슨은 그런 게 없었다. 그는 딱히 못생긴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케네디에 비해 잘생기지 않았다는 것에 좌절했다. 특히 TV토론회를 증오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수려한 외모의 케네디가 조목조목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닉슨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내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이건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는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에게 40만표 차이로 패배한 것이 단지 TV토론회와 부녀자들의 몰표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케네디는 자기 노력이 아닌 타고난 것들로 이루었다고, 닉슨은 불평했다. 닉슨의 생각에 케네디는 노력 없이 얻은 것들로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케네디는 부자고, 여자 문제도 복잡하며, 베트남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다. 자신은 치열하게 노력했고 자신의 손으로 성취했으나 공정하지 않게 미움받는 사람이었다.

선거를 제외하면 정작 그 둘 사이에 별다른 물리적 대결이 있었던 일은 없다. 그러나 닉슨은 평생 케네디와 그 지지자들을 가해자로,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겼다. 닉슨은 케네디와 같은 아이비리그 도련님들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비리그 도련님을 사랑하는 주류 언론을 경멸했다. 일찌감치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와는 선을 그었다. 내 편을 들지 않는 주류 언론은 조작과 음모와 아첨이 난무하는 가상의 악당이었다. 자신은 완전 무결한 피해자였다. 순백의 피해자였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가장 끔찍한 일마저도 더러운 일이 아닌 단지 다른 결과 맥락을 가진 복잡한 것일 뿐이라고 믿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그저 스스로를 오해받는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억울했다. 피해자라는 지위에 더없이 만족하고 자족했다. 요컨대 ‘나는 피해자니까 옳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 없는 억울함을 기반으로 어떤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나는 피해자니까 나의 부정은 너희들의 부정과는 달리 국가 안보와 같은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며 여기에는 매우 선명하게 다른 결이 있다’는 괴상한 자신감을 가졌다. 이와 같은 자신감은 결국, 미 합중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망쳤다.

당대를 다룬 영화들 속에서 닉슨에 대한 평가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평가를 공정하지 않다고 느낄 이유는 없다. 닉슨은 재임 기간 실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며 특히 정적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정치 보복에 있어서 리처드 닉슨보다 과감한 자는 없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적은 단지 정적이 아니라 슈퍼 빌런이었다. 자신과 같은 피해자에게 반대한다는 건 엄청난 악당일 수밖에 없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실관계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해서 선택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뒤틀고 조작했으며 그렇게 조작된 현실을 사실이라고 믿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나도 베트남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피해자다. 그러므로 나의 거짓말은 케네디의 거짓말과는 달리 더 큰 선을 위한 위대한 거짓말이다. 나는 옳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이런 종류의 인지 부조화는 계속되었다.

닉슨을 결정적으로 망가뜨린 가장 거대한 거짓말은 결국, 도청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은 물론 , 가능한 모든 적대적 대상을 도청했다.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에서 닉슨은 집무실 안 뒷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그러나 모든 대화는 연기가 아니다. 닉슨 스스로가 불법적인 녹음을 통해 역사에 남긴 녹취록이다. <더 포스트> 안에서의 닉슨은 실제 닉슨인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쓴 글을 통해 후대에 인용된다. 누군가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속의 연기를 통해 인용된다. 많은 이들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을 통해 후대에 인용된다. 닉슨은 자신의 명령에 의해 수행된 도청의 녹취록을 통해 인용되고 있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배신과 실패를 직면하게 될 일이 반드시 생긴다. 이에 대처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비슷한 일이 한두번 반복되다 보면 평상시에도 자연스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다양한 양태의 문제들에 있어서 단 한 가지 방식의 대응만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서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의 경우는 그랬다. 사소한 인간관계부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업무에 관련된 일에 이르기까지 몇번이고 그런 구덩이에 반복해서 빠져왔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닉슨을 떠올린다. 역사 속의 숱한 성공과 화려한 유산보다 닉슨의 실패와 몰락은 더 강력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꼴은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더 포스트>의 마지막 장면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첫 장면과 거의 같은 영화처럼 이어진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워싱턴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가 어떻게 워터게이트 사건을 취재하고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는지 보여준다. 영화 속에 저 유명한 ‘딥스로트’가 등장한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에게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었던 익명의 정보원이다. 밥 우드워드는 끝까지 비밀 정보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 비밀은 33년 만에 밝혀졌다. 지난 2005년 전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는 자신이 ‘딥스로트’였다고 고백했다. <더 포스트>보다 조금 앞서 공개된 영화 <마크 펠트: 백악관을 무너뜨린 남자>는 그에 관한 영화다. 마크 펠트는 좌절하고 패배한 순간 닉슨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피해의식에 빠져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대신 객관적이고 담대하게 신념을 보호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결국 닉슨 정부를 무너뜨렸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내부고발자 마크 펠트는 그렇게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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