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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 위 댄스?
심보선(시인)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8-04-26

최근 미술 작가와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만나기로한 날, 작가는 목보호대를 하고 나타났다. 우리는 작품 이야기를 하기 전, 뼈와 근육과 관절에 대해, 컴퓨터 앞에서 장시간 글을 쓰고 작업하는 사람들의 직업병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한때 요가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던 동작이 시간이 지날수록 되어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뜻대로 되지 않던 동작이라는 것도 실은 단순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다리를 뻗은 채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손바닥 대기 같은. 하지만 요가는 중간에 그만뒀다. 이유는 열정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요가에 별로 없어서라고 해두자(솔직히 말하면 끈기가 없어서였지만). 요가에서 관건은 오히려 흥분과 잡념을 덜어내는 것이었다. 열정과 상상력이 흥분과 잡념으로 흐르지 않으면서도, 말하자면 적절히 통제되면서도 몸과 마음의 이완과 창발을 끌어내게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있다. 바로 무용이다.

대체로 무용은 이렇게 분류된다. “배우지 않고도 출 수 있는 춤”, “배우면 쉽게 출 수 있는 춤”, “배우면 웬만큼 출 수 있는 춤”, “배우고 배워도 출 수 없는 춤”. 한쪽 끝에는 “막춤”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예술”이 있는 무용의 스펙트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난이도에 따른 무용의 분류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무용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열정과 상상력의 통제와 표현, 그것을 통한 몸과 마음의 이완과 창발”이다. 나는 사실 남몰래 춤을 추어왔고 혼자서 이런저런 안무를 만들어 반복적으로 연습해왔다. 춤의 기쁨과 재미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또 다른 선물도 있다.

오래전 나는 어떤 사람과 만날 때마다 논쟁을 해서 사이가 틀어진 적이 있었다. 또다시 논쟁을 이어가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제안을 했다. “춤이나 춥시다.” 나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거절을 했다. 그는 계속 고집했다. 나는 마지못해 그가 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춤에 빠져들었고 우리 둘은 미친 듯이 춤을 춰댔다.

물론 그 이후 그와의 관계가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반드시 춤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왠지 그를 끝까지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와 나는 단둘이 광란의 춤을 춘 사이이기 때문이다.

문화연구자 앤드루 휴잇은 “사회적 안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적 몸짓과 집합적 움직임은 사회적 구조와 조직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관습화된 사회적 안무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안무를 통해 조금은 다른 삶을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무용을 통해 몸 사용법을 성찰하고 넘어서며 자신과 타인, 사회의 신체를 새롭게 느낄 수 있다.

몸과 마음의 이완과 창발이란 신체의 교정과 치료에만 그치지 않는다(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꾸준히 무용을 해온 친구는 내게 말했다. 무용을 하면서 집중력과 공간 지각능력이 발달했다고. 이 말은 내게 무용을 통해 작은 것과 큰 것을, 더 작고 더 크게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약간 생뚱맞지만 선언조로 마무리를 하겠다. 우리 모두는 이미 춤을 추고 있다. 이제 다른 춤을 춰야 할 때가 왔다. 자신을 위해, 타인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