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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자애답게
윤가은(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8-07-25

영화 촬영을 앞두고 스탭들과 함께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서 진행하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았다. 교육 중 P&G의 <여자답게>(Like a Girl) 캠페인 영상을 오랜만에 다시 봤는데 여지없이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어왔다. 2015년 칸국제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 3분짜리 영상은 미국 사회 내 어느 순간 조롱과 모욕의 언사가 되어버린 “여자애처럼”이란 표현에 대해 인식 전환을 일으키는 놀라운 작품이다. 감독은 모델로 선 젊은 성인 남녀에게 “여자애처럼 달리고, 공을 던지고, 싸워보라”고 주문하고, 대부분이 연약하고 우스꽝스럽고 미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감독이 실제 어린 소녀들에게 “여자애처럼” 행동해보라고 주문했을 때, 그녀들은 있는 힘껏 달리고, 팔이 떨어져라 공을 던지고, 무서운 얼굴로 망설임 없이 주먹과 발을 휘둘러 공격한다. 그렇게 진짜 여자애다운 행동은 진짜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답게 움직이는 것뿐이라는 것을 실제 소녀들이 멋지게 증명해낸다.

영상을 보며 최근 논란이 된 국방부 장관의 발언이 떠올랐다. 얼마 전 장관은 군내 성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자 군 내 성고충 상담관들과 만난 간담회에서 “여성들이 행동거지라든가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여자들 일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많아 이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자신의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며 즉시 해명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전체 영상을 봐도, ‘아직 남녀평등 사회도 아니고 제도적 뒷받침도 부족하니 여군들이 알아서 조심해야 성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 정도의 맥락으로밖에는 잘 파악이 되지 않는다. 과연 여성들이 먼저 알아서 조심해야 할 행동거지는 무엇일까. 범죄를 유발하지 않게, 여성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과연 또 다른 의미의 제약과 불평등을 야기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해라는 그의 해명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데, 어쩌면 그가 지난해 “식사 전 얘기와 미니스커트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한다”고 말했다 사과한 전적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며칠 뒤 다른 기사에서 그가 최근 혜화역 여성집회 참여자들의 특징과 대규모 집회의 요인을 분석하고 정책적 대응방향을 제시하는 토론과 강연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금 놀랐다. 그의 이번 행보가 앞으로 더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잘 모르는 분야를 인정하고 제대로 공부하기 위한 취지에서 선택한 결과라고 믿고 싶다. 이렇게 사회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고, 사람들이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희망을 제발 갖고 싶다.

아무튼 정말 놀랄 만큼 변하고 있긴 하다. 불과 3년 전엔 상상조차 못했는데, 이젠 촬영을 앞두고 의무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 속에서 영화를 준비 중이니 말이다. 새삼 영화 <걷기왕> 현장을 앞두고 영화계 최초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 남순아 감독에게 감사를. 그리고 늦기 전에 어서 우리 팀의 소녀 배우들에게 저 영상을 보내야겠다. 우리 진짜 여자애답게 멋지게 한번 달려보자고. 정말, 진짜 여자애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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