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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엘리트
김혜리 2018-08-01

<더 스퀘어>

예술계 인사들을 초청한 미술관 파티에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등장한다. 유인원으로서 행동하는 그는 점잖게 미소 짓는 고상한 손님들을 압박해 사회적 가면을 떨어뜨리도록 한다. 예술 관람자에게 보장된 안전거리를 침해해 부르주아 감상자의 셀프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이다. 공연을 기획한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의 상황통제 시도는 보기 좋게 묵살된다.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로켓 역을 퍼포먼스 캡처로 연기한 배우 테리 노타리가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분한 이 각본 없는 장면에서 곤욕을 치르는 손님들은 실제 예술문화계 엘리트들이다. 이 곤혹스런 장면은, ‘다름’을 포용하는 이론은 풍부히 갖췄으나 타자와의 스킨십에 무능한 유럽인의 상태를 비유한다는 점에서 <더 스퀘어>의 축소판이다. 한편 극중에서 논란을 빚는 전시회 홍보영상과 동일한 질문을 품은 시퀀스이기도 하다. “당신은 어느 정도의 야만이 행해져야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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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때는 슈퍼히어로영화가 대량생산 상향평준화하기 전인 2010년 이전. 사람들은 역대 최고의 슈퍼히어로영화를 묻는 질문에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2000)과 브래드 버드의 <인크레더블>(2004)을 꼽곤 했다. 예외적 힘을 가진 영웅의 존재 의미와 존재 조건을 다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슈퍼히어로를 불완전한 제도보다 신뢰할 만한 정의의 해결사로 허용해야 할 것인가, 사회 일원으로서 공권력의 통제 아래에 둬야 할 것인가라는 <인크레더블>의 의제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의 문제의식을 12년 앞선 셈이다. 물론 히어로영화가 작은 장르가 돼버린 지금 잘 만든 슈퍼히어로영화를 가리는 기준은 필수사항 체크 매뉴얼에 가까워졌다. 액션 세트 피스는 얼마나 멋진가? 악당은 매력 있나? 캐릭터들의 기여는 조화로운가? 히어로의 존재론은 있으면 고맙고 없어도 지장 없는 전공 선택 과목 비슷해졌다. 브래드 버드의 <인크레더블>은 나의 ‘최애’ 픽사 영화는 아니지만 어떤 작품보다 픽사의 주요 표적이 성인 관객임을 입증한 케이스였다. 신념과 일상의 괴리, 결혼의 명암, 남성성의 위기 등 실사영화에서만 보아온 테마들이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슈퍼히어로들을 통해 이야기되는 광경은 참신했다. 온갖 액션 스펙터클이 기억에서 씻겨나간 다음에도 미스터 인크레더블 밥(크레이그 T. 넬슨)이 괴롭게 근무하던 보험회사의- 애니메이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무채색 사무실이라든가, 왕년의 히어로가 조그만 박스형 승용차에 거구를 구겨넣은 모습만큼은 오래 뇌리에 남았다. <인크레더블>은 새로운 악당의 등장과 가족의 출동으로 마무리됐다. 어떤 픽사 영화보다 속편을 붙이기 쉬운 엔딩이었지만 10년이 넘도록 속편 소식이 없었고, 솔직히 그 점은 (크리에이티브를) 가진 자의 여유로 비쳐, 픽사에 대한 나의 경외감을 북돋웠다. 그러나 픽사의 영토에도 해가 기우는 시절이 왔고, <인크레더블2>는 <몬스터 대학교>(2013), <도리를 찾아서>(2016)가 전편의 영광을 다소 바래게 한 다음, 픽사 속편의 한계를 깨는 임무에 도전하게 됐다. 먼저 개봉할 예정이었다가 내년으로 미뤄진 <토이 스토리4>에 시간을 벌어주는 건 덤이다.

14년 터울 속편인 <인크레더블2>는 놀랍게도 1편이 끝난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지금쯤 대쉬(헉 밀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헬렌(홀리 헌터)은 손자와 놀고 있겠지 짐작했던 관객만 나이 들었다. 브래드 버드 감독/작가의 이와 같은 결정은 인물들의 슈퍼파워가 가족 내 역할 및 연령대와 밀접한 <인크레더블>의 특성상 불가피해 보인다. 힘센 미스터 인크레더블 밥(크레이그 T. 넬슨)은 생활고를 돌파하고 식구들을 끌고 가야 하는 한창 나이의 가장이고, 일라스티걸 헬렌은 팔을 뻗쳐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돌보고 가족 모두를 끌어안는 엄마다. 바이올렛(사라 보웰)의 투명해지는 능력과 방어막은 10대 특유 수줍음과 내성의 발현이고 대쉬의 광속 질주력은 산만하고 쉽게 흥분하는 10살 소년의 ADHD적 속성을 반영한다. 불덩이로 변하고 체구를 맘대로 조절하는 등 무려 17가지에 달하는 막내 잭잭(엘리 푸실)의 파워는, 장차 무엇이 될지 모르는 아기들의 무한한 잠재력의 메타포다. 브래드 버드가 왕년에 참여했던 <심슨 가족>과 비슷한 이유에서 <인크레더블>의 파 가족은 나이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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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크레더블2>는 액션영화로 볼 때 제일 만족스럽다. 슈퍼히어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나선 일라스티걸이 반으로 쪼개지는 일라스티사이클을 타고 모노레일 사고를 막는 세트 피스의 안무는 브래드 버드 감독이 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스카우트됐는지 새삼 납득하게 만든다. 14년간 진보한 애니메이션 기술은 근경에서 원경까지 다양한 요소가 움직이는 훨씬 복잡한 액션 설계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기 잭잭이 너구리와 드잡이를 벌이는 부분은 애니메이션의 원초적 쾌감을 일깨우는 영화 속 단편영화다. 악당 스크린 슬레이버를 잡으러간 일라스티걸이 스크린으로 가득 찬 ‘최면의 방’에 갇혀 싸우는 번쩍이는 신도 관객에게 광발작을 일으킬 위험이 우려되긴 하지만, 픽사 영화에서 오랜만에 보는 모험적 연출이다. 클라이맥스에서 펼쳐지는 차원 이동 액션은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의 도입부에서 블링크(판빙빙)와 동료 엑스맨이 보여준 콜라보레이션 못지않다.

이상의 스펙터클을 반주하는 마이클 지아치노의 음악은 1편에 이어 대놓고 007스럽게 흥겨워서 관객은 이야기의 흠을 잡을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인크레더블2>의 시나리오에는 1편의 응집력이 결여돼 있다. 슈퍼히어로와 미디어에 의존하는 대중을 혐오하는 악당 스크린 슬레이버의 논리는 꽤 설득력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싸우는 일라스티걸의 모험과 그동안 집에서 육아와 가사로 애먹는 미스터 인크레더블의 고충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한다. 액션을 낳는 영화의 메인 갈등과 주인공들의 가족으로서의 성장담이 이렇다 할 접점이 없는 것이다. 엘리트 숭배를 척결하려는 스크린 슬레이버와, 일상과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슈퍼히어로의 논쟁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 <인크레더블>은 애니메이션과 히어로영화 양쪽에 모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영화였고, <인크레더블2>는 쉴 새 없이 재미있으나 할리우드의 고급 기성품 생산 시스템이 낳은 무난한 속편 영화다.

사족. <인크레더블2>가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을 앞세운 영화라는 평가 내지 불만은 나로서는 뜻밖이다. 남자가 밖에서 일하는 아내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다는 설정은 이미 1980년대에 할리우드 실사영화가 충분히 극화한 소재로 14년 전에도 케케묵은 이야기로 느껴졌을 터다. <인크레더블> 시리즈가 대략 1960년대 미국을 시각적 레퍼런스로 삼은 복고풍 미래 영화라는 사실이 주제의 낡음을 완전히 상쇄할 수는 없다. <인크레더블2>의 ‘여성주의’를 굳이 말한다면 동시대성보다 배역의 ‘양’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브래드 버드는 메인 액션 히어로와 악역을 여성에게 배정하고 딸 바이올렛에게 더 넓은 행동반경을 부여했으며, 유엔 특사, 발명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역할과 비중의 조연에 여성 캐릭터를 배치했다.

<어느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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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온 것들의 집

<어느 가족>은 돈 때문에, 돌아가기 싫은 과거 때문에, 외로워서 모여 사는 할머니와 중년 커플, 젊은 여성과 10대 소년이 부모에게 방치된 어린 소녀를 데려와 식구를 늘리며 시작한다. 꼬마 유리(미유 사사키)를 새로 거두며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공간을 고민하지 않는다. 누울 자리만 있으면 족하다. 육체노동과 좀도둑질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집은 관청에 독거노인으로 등록된 하츠에(기키 기린)의 소유로, 어차피 나머지 식구도 법의 관점으로는 투명인간이다. 좁은 실내에는 사생활의 구획이 없고, 벽과 바닥은 가족이 줍고 훔쳐온 물건으로 꽉 채워져 있다. 그것들은 남루하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지만 나름의 질서에 의해 서로에게 기대어 쌓여 있다. 마치 이 집에 사는 사람들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는 좌식 생활의 눈높이로, 밀도 높은 실내를 줄곧 지켜본다. 영화 후반 가족들이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관객이 깊은 숨을 내쉬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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