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디스토피아로부터
인간답게 일하기 위해
윤가은(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마이자 2018-10-17

얼마 전 두 번째 장편영화의 촬영을 마쳤다. 아직 갈 길이 구만리지만 함께 수고한 동료들과 마주 보고 웃으며 마무리를 축하하게 되었단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감개무량한 요즘이다. 어쨌든 우리는 저예산의 압박과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 그리고 팀원들의 부상과 개정된 노동법으로 인한 혼란과 그 밖의 여러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정면으로 통과했고 결국 완주는 해냈으니깐. 두어달 남짓 동안 작은 독립영화 한편 찍은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비장한가 싶겠지만, 아무튼 올여름은 더워도 너무 더웠고,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부족하기 짝이 없었으며, 응당 지켜야 할 것들을 새삼 진지하게 지키느라 말 그대로 매일 죽다 살아나야 했다. 이토록 훌륭한 스탭과 배우들이 한마음으로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매 순간 모든 것이 불가능했을 현장이었다. 결국 모든 현장이 우리와 같겠지만.

날마다 기록을 경신하는 폭염 속에서 절절매며 촬영을 이어가고 있을 때, 한 드라마 스탭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30살 건강한 청년의 죽음은 온열사 혹은 과로사로 의심된다고 보도되었다. 우리 팀원들도 연이은 불볕 촬영에 돌아가며 더위를 먹고 있을 때라 같은 현장인으로 충분히 납득이 되는 사인이었다. 그나마 우리 팀은 아이들이 중심이라 햇빛이 쨍한 정오부터 2시간 정도는 최대한 촬영을 피하자는 방침을 세웠지만, 그마저도 바뀐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 52시간 하루 10시간 촬영을 지키느라 지정된 휴게시간 이상을 마련하기 어려워 매일 점심때만 되면 쉬네, 마네 난리도 아니었다. 법은 바뀌었는데 제작비는 큰 차이가 없으니 계산이 맞지 않는 게 당연했지만, 그래도 헤드들은 방법을 마련해야 했기에 그나마의 쉬는 시간을 모두 전쟁 같은 회의에 바쳐야 했다. 우리가 이 정도였으니 생방송을 앞두고 초다툼을 하며 진행되는 빠듯한 드라마 현장에서 그가 어떤 과로와 부담에 시달렸을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후에 그가 지병에 따른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과로사가 아니라는 보도가 이어졌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정말 그가 경험한 장시간의 과노동과 스트레스는 그의 건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정말 이 산업은 그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최근 드라마 현장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는 이른바 ‘디졸브 촬영’, 즉 아침 일찍 시작한 촬영이 20시간을 넘기고 다음날 새벽에 끝나도 몇 시간 뒤에 다시 촬영이 재개되는 관행이 여전히 계속된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스탭들은 기본적인 수면 시간도 확보하지 못한 채 매일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몇달간 지속하는 셈인데, 그나마도 잘하는 아흔아홉 가지는 티도 안 나고 미약한 한두개의 실수만 전면에 드러나 모두의 눈총과 질타를 받으니 미칠 노릇인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도중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많은데 그 자리는 금세 열정적이지만 경험 없는 젊은 친구들로 채워져 다시 똑같은 상황을 반복하게 된다고, 사람이 계속 부속품처럼 갈리니 결국 누구도 서로를 존중하지 않게 되는 분위기라며 그는 한탄했다.

개정된 노동법이 제대로 적용된다면 이런 관행이야 점차 사라지겠지만, 작품을 위해 사람을 갈아넣던 자리에 과연 무엇을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가, 정말 돈만이 그 공백을 모두 메울 수 있을 것인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이 과도기에 인간답게 일하기 위해 모두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어떤 고민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