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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형 프로그래머의 <쇼걸> 뼛속까지 길티 플레저

감독 폴 버호벤 / 출연 엘리자베스 버클리, 카일 맥라클란, 지나 거손 / 제작연도 1995년

10년 전, <씨네21> 창간 13주년 기념 ‘1995-2008 영화 베스트10’ 선정에 참여한 적이 있다. 리스트를 채워갈 즈음, 한편의 영화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포함시키지 않았다. 얼마 후, 어느 영화제에서 만난 당시 <버라이어티>의 수석 평론가에게 그때 포함시키지 못했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난 그 영화를 항상 베스트10에 빼먹지 않고 넣는걸!” 폴 버호벤의 <쇼걸>은 내게 뼛속까지 부끄러운 길티 플레저였던 셈인데, 이후 “사실 나도 너무 좋아해”라며 속삭이는 사람을 만날라치면 그 은밀한 반가움과 동맹의식에 부들부들 기뻐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대놓고 컬트의 명성을 갖게 된 <쇼걸>의 팬덤은 사실 수줍지도 조용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개봉 당시 폴 버호벤-조 에스터하즈 콤비의 전작인 <원초적 본능>(1992)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의 혹평에 난자되었던 이 영화가 부활했던 장소는 미국 전역의 재개봉관이었다. LA의 심야 상영에는 영화의 두 주인공인 노미 말론(엘리자베스 버클리)과 크리스탈 커너스(지나 거손)의 머리와 의상으로 한껏 꾸민 채 대사와 몸짓을 따라하는 게이 언니, 오빠들로 가득했고, 급기야 악평을 쏟아내던 평론가들도 하나 둘 영화의 컬트적 매혹을 고백하며 커밍아웃하기 시작했다. 이 예상치 못한 팬덤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성공한 덕후는 아마도 재개봉 당시 순회 라이브 코멘터리를 담당했던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데이비드 슈매더일 텐데, 이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가득한 그의 형식주의(!) 분석은 <쇼걸>의 다양한 DVD 버전 중 최고로 손꼽히는 VIP 에디션 박스세트 디스크에 수록되어 이후 <쇼걸> 팬덤의 바이블로 자리잡았다.

슈매더에 따르면 <쇼걸>이 위대한(!) 영화인 이유는 “프로덕션의 모든 순간에서 최악을 선택하면서(지나 거숀은 여기서 제외된다) 완성된 어떤 불가사의한 일관성”이라고 단언하며 영화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3대 핵심 모티브인 ‘가슴, 손톱 그리고 감자칩’의 기능을 분석한다. 한편 ‘최악의 영화상’을 포함해 무려 12개 부문을 석권한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 참석하기도 했던 폴 버호벤은 2015년 인터뷰에서 <쇼걸>에 대한 무한한 팬덤에 감사하는 동시에 영화에 담긴 자신의 미학적 의도는 모든 것들의 ‘과장’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42번가>(1933)나 <브로드웨이 멜로디>(1929) 같은 고전 할리우드 뮤지컬 플롯의 과장, 움직임의 과장, 음악의 과장, 색채의 과장(그리고 버호벤은 빼놓고 말했지만 살색과 몸매의 과장과 욕설의 과장, 그리고 카일 맥라클란 머리의 과장).’

나는 버호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그 모든 과장의 순간, 그 순수하게 오락적인 스펙터클에 감각을 맡기며 그들의 몸짓을 따라하고 저렴하기 짝이 없는 언니들의 대사를 따라하는 그 수행의 쾌감은 그 어떤 영화적, 예술적 경험에서도 얻어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짜릿한 경험의 순간, 이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몽땅 사라지는 것이다. 연말을 맞아 다시 한번 ‘<쇼걸> 무브-얼롱(move-along)’ 상영회를 마련해봐야겠다. 우리 집에서.

박진형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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