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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으로 살아보기
이동은(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9-01-16

지난 연말 모 방송사의 연기대상을 받은 한 드라마는 한 남자 가장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육체를 빌리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뤘다. 올 1월에 시작하는 다른 방송사의 한 드라마도 육체가 서로 바뀌어 다른 삶을 사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극장가에도 두 주인공이 우연한 사고로 서로 몸이 뒤바뀌는 내용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아니, 영혼이 바뀌는 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삶은 상상 속에서나 살아볼 수 있다. 보디 체인지가 픽션의 소재로 자주 채택되는 이유다. 극적 효과를 위해 다름의 간격은 멀수록 좋다. 따라서 인물들은 주로 대조되는 위치에 있다. 남자는 여자와 몸이 뒤바뀌고, 어른은 아이와, 범인은 형사와,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와 바뀐다. 심지어 사람은 개가 되어 인생이 견생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바뀐 몸으로 세상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나와 다른 처지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삶 역시 진정으로 변화한다. 분명 전과 같은 세상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가능한 일이다.

몸 바꾸기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 역지사지는 픽션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꼭 그렇게 몸이 바뀌어야만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세상을 알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주말이면 시내에서 태극기를 들고 집회하는 군중을 보는 일이 익숙해졌다. 소위 보수와 멸공을 자처하는 단체가 중심이 되어 모인 집회다. 지난 정권, 광장에서 촛불집회를 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배후 세력을 묻던 극우 단체들은 이제 거리로 나와 매주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든다. 과거 시위하는 이들에게 선동하는 빨갱이라고 욕하던 그들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리며 깃발을 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이 현 경제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거라는 논조로 기사를 쓰던 한 언론사의 기자들은 새해 자신들의 임금협상에서는 현재 임금으로는 제대로 된 취재 활동이 어렵다며 임금인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파업 노동자들을 두고 밥그릇이나 지키려고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이기주의자라고 혀를 차던 택시 기사는 지금 어쩌면 그 택시 뒤에 업계 요구사항과 파업 메시지를 담은 검은 띠를 달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그거 해봐서 아는데” “나도 다 겪어봤는데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처럼 실제 내가 몸소 뼈아프게 경험했을지라도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착각과 편견을 더 굳힐 수도 있다. 그 경험 속에는 나라는 존재가 개별적이지만 늘 다수와 소수의 여러 소속을 함께 가지고 있는 다층적인 교집합이라는 사실, 따라서 나는 언제든 네가 될 수 있고, 내가 그들이 될 수 있고 그들도 언제든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로 이끌어주는 서사가 빠져 있을 확률이 높다. 현실에서 나는 타인의 몸으로 살 수 없고, 쉽게 역지사지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지만 픽션 속에서는 가능하다. 아마도 그것이 수없이 재생산되는 이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