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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강유가람 감독의 <낮은 목소리>

모두가 사람의 일

감독 변영주 / 출연 나눔의 집 할머니, 이용수 / 제작연도 1995년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거 같다. 당시 활동하던 동아리에서 통일 문제를 두고 의견들이 오가던 중, 선배들이 주한미군 범죄 사진전을 열자고 했다. 주한미군에 의한 범죄를 근절하고 불합리했던 한미주둔군 지위 협정에 문제를 제기하자는 취지였다. 전시물 중에는 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기지촌 여성 윤금이씨의 살해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전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내 여성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이가 격분해 찾아와서는 당장 사진을 철거하라고 했다. 당시에는 그가 왜 그렇게 분개하는지,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페미니즘을 만나고 나서야 그가 분노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고통을 이용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것, 고통을 전시하는 것은 의도와 달리 오히려 정반대의 화학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특히 여성의 피해를 그리는 것은 오히려 그 피해를 착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재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출연자들을 만날 때면 늘 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출연자를 카메라에 담는 나는 경험도 배경도 환경도 제한적인 사람에 불과하다. 출연자의 삶과 경험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어떤 관계를 맺어야 그것이 가능한지 항상 의문이다. 기지촌 여성의 삶을 다룬 <이태원>을 작업하면서 출연자와의 관계로 고민에 빠졌을 때 내가 기댔던 영화는 <낮은 목소리>였다. 이 영화의 제작노트를 보면서 카메라와 출연자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낮은 목소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가 송년회 자리에서 노래하는 장면으로 나에게 각인되어 있다. 일본에 대한 분노와 삶에 대한 한탄이 묻어나오는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 강덕경 할머니와 연대자들이 함께하는 장면에서 나는 강덕경이라는 인물에게 성큼 다가가는 느낌을 받았다. 노래가 끝날 무렵엔 강덕경이라는 인물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낮은 목소리2>(1997)에서는 박두리 할머니가 노래하거나 걸걸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닭똥을 치우시는 장면에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낮은 목소리> 연작은 이분들의 현재 일상이 어떤지를 계속 보여준다. 슬픔과 분노가 일상화된 삶이지만, 그 속엔 소소한 기쁨도 있고, 실없는 농담도 존재한다. 카메라와의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다보면 카메라가 정말 할머니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시선에 같이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나와 할머니들은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리고 할머니들과 나의 관계는 다른 지평으로 이동한다. 상징화된 존재가 아닌 살아 있는 개개인으로서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면서 이분들이 피해를 증언하기까지의 고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분들의 증언이 운동가의 목소리로 힘 있게 다가올 때, 여성으로서의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 <낮은 목소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어느 순간 연결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카메라의 자세를 알려주는 영화다.

강유가람 다큐멘터리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을 연출했다. 공간의 변화와 여성의 삶을 기록하는 데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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