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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박근영 감독의 <러브레터>
박근영(영화감독) 2019-05-21

기억하는 일

감독 이와이 슌지 / 출연 나카야마 미호, 도요카와 에쓰시, 사카이 미키, 시노하라 가쓰유키, 가시와바라 다카시 / 제작연도 1995년

큰 군부대가 인접한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군 주둔지 내의 복지회관에서는 매달 한편의 영화를 무료로 상영했는데, 친구들과 모여 보러 가곤 했다. 그 시절 접한 대부분의 영화를 그곳에서 만났다. 1999년, 학교에서 가장 떠들썩하게 화제가 된 영화는 <매트릭스>였다. 하지만 나의 1999년을, 아니 청소년기 전체를 온전히 사로잡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복지회관의 한 좌석에 앉아 <러브레터>의 오프닝을 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설원 위에 죽은 듯 숨을 참고 누워 있던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뜨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눈을 털고 일어난 여자가 넓게 펼쳐진 설원을 걸어내려가는 원경이 오랫동안 펼쳐진다.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 이후 용돈을 모아 <러브레터>의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했고, VHS플레이어가 달린 작은 TV가 있던 교회 독서실의 책상에서 밤마다 돌려보았다. 당시 나는 운동선수를 꿈꾸던 중학생이었다. 함께 운동하던 친구들에게 <러브레터>를 보여주고 싶어 집으로 초대해 거실에 모여 비디오를 틀었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 돌아보면 친구들이 모두 자고 있었던 날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같은 반의 짝사랑하던 친구를 얘기하며 나카야마 미호를 닮지 않았냐며 방정을 떨기도 했다. 운동선수의 꿈을 접고 나서, 설원이 펼쳐진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영화를 만들게 된 이후 다시 본 <러브레터>는 완전히 다른 감흥을 주었다.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죽은 이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 죽은 이에게서 답장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름이 같아 생긴 작은 오해로 미스터리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히로코와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둘의 오가는 편지 속에서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공유한다. 히로코는 애도하는 마음으로, 이츠키는 잊고 지낸 과거를 추억하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통해 죽은 연인에 대한 그리움 속에 살던 히로코는 간신히 연인이 떠난 그 장소에서 작별 인사를 외친다.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간다. 이츠키는 잊고 지내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미 죽은 이의 그 시절 숨겨놓았던 감정을 만난다. 그렇게 삶 속에서 죽음을 만난다. 이 밖에도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와 설정으로 섬세하게 짜여져 있다. 죽은 듯 숨을 참고 설원에 누워 있는 얼굴, 추도식, 독감에 걸린 이츠키가 병원에서 독감으로 죽은 아버지를 마주한 일. 눈 속에서 발견한 잠자리, 죽은 이츠키를 이야기하는 친구들. 죽음은 산 자의 것이다.

5년 전 겨울, 오타루로 여행을 다녀왔다. 곳곳을 걸으며 시간을 보낸 뒤 외진 골목의 실내 포차에 들어갔다. 아주 작은 가게였기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손님들이 엉덩이를 붙이며 자리를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처음 만난 모든 이가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나는 서툰 영어로 <러브레터>에 대한 기억이 나를 여기에 데려왔음을 이야기했다. 내 얘기를 듣고는 수염이 덥수룩한 포차 주인이 자신이 그 영화의 추도식 장면에 출연했던 이츠키의 친구들 중 한명이었다고 사진을 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나는 그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시 오타루의 포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 시절을 추억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박근영 영화감독. <한강에게>(2018)를 만들었다. 현재 전주시네마프로젝트 2020에 선정된 차기작 <정말 먼 곳>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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