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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논쟁
2002-05-11

편집장

술 마시다가 남동철과 논쟁을 벌였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아이언 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뜨악하지게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간략하게 중계하자면 이렇다.

남:<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최근의 멜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만듦새도 좋고, 무엇보다 캐릭터가 참신하다. 윤리적 금기 뿐만 아니라, 전통적 여성성으로부터 이만큼 자유로운 여성 캐릭터를 최근 몇년간의 멜로에서 보지 못했다. <아이언 팜>은 너무 허술하고 진부하다.

허:<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만듦새가 좋은 건 동의한다. 상대적으로 <아이언 팜>이 허술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언 팜>을 지지한다. <아이언 팜>이 훨씬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영화적이지 않으면, TV드라마의 대체재로 전락한다. 영화적이려면 스크린 사이즈에 대한 자의식이 있든가, 아니면 영화사와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해야 한다. <아이언 팜>은 많은 영화사적 기억을 인용하는 코미디다.

남:영화사적 기억만 있다면 아무리 엉망인 영화도 잘 만든 TV드라마보다 우월하다는 말인가.

허: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건 영화의 편에 서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TV드라마로 가도 관계없어보이는 영화를 만듦새나 이야기의 세련도만으로 좋은 영화의 범주에 넣기 시작하면, 영화는 더이상 존재의의가 없어진다. 내가 자청해서 극장의 어둠 속에 들어가 스크린을 대할 때는 궁극적으로 다른 매체에서 얻지 못하는 종류의 즐거움을 얻고 싶어서이다. 그 즐거움은 영화적인 것이어야 한다.

남:이미 TV는 오래전부터 영화를 대체해왔다. 너무 낡은 이분법 아닌가.

허:맞다. 영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TV에 자리를 빼앗겨왔다. 그래서 60년대 이후의 많은 작가주의 영화들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고전기 영화사적 기억을 인용하고 유희하는 데 몰두했다. 옹색해보이지만 그렇게라도 영화 코뮤니티가 정체성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실제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같은 영화의 좋은 점을 평단 전체가 인정한다고 해서 영화가 없어지거나 아니면 그 때문에 위축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너무 비현실적인 조바심처럼 보인다.

허:실제로 힘이 줄거나 없어질까봐 그런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영화의 존재가치에 관한 문제다. 영화산업이 지금보다 훨씬 더 발전하더라도, 우리가 영화적인 것이라고 느끼던 것들이 사라지거나 소수에 의해서라도 지지되지 않는다면 더이상 영화를 말하고 그걸 붙들고 있고 싶어지지 않아질 거다.

남:영화에 한정해서 말해도 이야기와 캐릭터가 점점 더 허술해지고 있는 추세인데, 그걸 방치하는 게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허:그것도 문제다. 하지만 영화의 정체성이 더 큰 문제다.

남: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 같다.

허:영화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영화가 내게 무엇인가에서의 차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