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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게임의 일
김겨울(유튜버) 2020-09-23

직업이 직업이라 이틀에 한번꼴로 책을 추천해달라거나, 독서의 효용을 이야기해달라거나, 책 안 읽는 우리 상사와 우리 아이를 설득해달라는 강연 요청 및 구독자들의 메시지를 받는다. 강연을 하러 가서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다른 매체가 아니라 책인지 말해달라는 주최측의 요구에 1시간30분정도를 들여 답한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강연을 마치고 나서 현장 질문을 받으면 두번 중 한번꼴로 누군가 묻는다. 책을 꼭 읽어야 하나요?

이 질문은 사실 외통수 질문이다. 나는 매번 “모두가 꼭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하면서 “영화나 게임 같은 다른 좋은 매체들이 있습니다”라고 부연한다. 문제는 내가 다른 좋은 매체에서 느낀 감상이 내가 책을 많이 읽기 때문에 생긴 감상 능력인지는, 대조군을 두고 실험을 해본 게 아니라면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2회차 정도에 책을 읽지 않고 살아봤다면 자신있게 답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진심이다. 훌륭한 게임은 그 자체로 종합예술이다. 사용자가 게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토리에 더욱 몰입한다는 점에서, 게임은 같은 영상 예술인 영화보다 감상자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예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의 분리 문제를 다룬 <SOMA>나 극단적인 정치사상이 불러올 수 있는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바이오쇼크>,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같은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책보다 훨씬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

모든 책이 좋은 책이 아니고, 모든 영화가 좋은 영화는 아니듯이,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모든 독자가 책의 의미를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고, 모든 관객이 영화의 메시지를 인상 깊이 받아들이지 않듯, 모든 플레이어가 게임의 철학적 의미를 질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떤 좋은 책과 좋은 영화와 좋은 게임은 어떤 사유하는 독자, 관객, 플레이어에게 마음속에 하나의 점을 찍고 지나간다. 지워지지 않고 인생의 어떤 날에 불현듯 떠오를 지워지지 않는 점을.

직업이 직업이라 나는 못내 그러한 향유의 능력이 책을 통해 발현되고 성장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훌륭한 영화와 게임을 통해 마음에 남은 그 점을 형상화하고 사유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다른 어떤 매체도 가지지 못한, 언어만이 유일하게 가진 힘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친구들과 시간을 잡아 <어몽 어스>(우주선을 배경으로 하는 마피아 게임의 일종)를 한다. 메신저로 그룹 통화를 걸고, 우리끼리 플레이하는 방을 만들고, 다 같이 요란하게 떠들며 임포스터(마피아에 해당하는 역할)를 색출한다. 명절마다 모이던 친구들인데 올해는 영 못 모이게 되어 우리는 게임에서 만나 왁자지껄 떠들고 안부를 전한다. GOTY(Game of the Year)에 선정되는 근사한 게임을 하며 철학적인 질문을 하지 않아도, 게임은 이런 일을 해주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