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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숨겨진 걸작 '불나비'

1960년대 팜므 파탈의 이미지

<불나비> 제작 연방영화주식회사 / 감독 조해원 / 상영시간 106분 / 제작연도 1965년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는 한해 200편 가까이 만들어졌다. 그 많은 영화들 중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은 유명 감독이 만들었거나 흥행에 성공한 각 장르의 대표작 정도로 한정된 것이 사실이다. 즉 흥행 수익이라는 선명한 목표를 최우선 가치로 만든 수많은 대중영화는 그 존재나 면모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1960년대 한국영화를 장르로 분류해보면 크게 멜로드라마, 코미디, 액션 스릴러, 사극, 청춘영화 그리고 당시 한국영화계만의 독특한 장르라 할 문예영화(문학을 원작으로 한 예술영화)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장르 법칙을 한국영화에 이식하는 건 어떤 장르든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특히 미스터리 스릴러의 난이도가 가장 높았다. 할리우드영화처럼 만들고 싶지만 잘되지 않았던 대표적인 장르로, 무엇보다 관객의 호기심을 마지막까지 끌어갈 수 있는 정교한 설계의 각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스터리 스릴러를 내건 한국영화에 대한 평문을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서구영화처럼 만들었는가, 이와 유사한 장르적 분위기를 구축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비평계의 칭찬을 받은 작품이 바로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과 조해원의 <불나비>다. 전자가 호러적 요소를 가미한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라면 후자는 본격적인 추리영화를 표방하며 클라이맥스의 액션 장면까지 결합해 잘 만든 대중영화로 합격점을 받았다.

미스터리 장르의 한국화를 위한 도전

<불나비>의 연출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조해원이 맡았고, 시나리오는 베테랑 작가로 활약하던 김강윤이 썼다. <상록수>(1961), <>(1963) 등 1960년대 초반 신상옥 영화의 각본으로 주목받은 김강윤은 시나리오작가가 본업이었지만 감독이기도 했다(데뷔작은 1959년 연출한 <이름 없는 별들>). <불나비>는 공식적으로 연방영화사의 작품이지만 실질적인 제작 역시 김강윤이 맡았다. 그는 멜로드라마와 액션영화가 주류를 이뤘던 당시 한국영화의 장르 지형을 바꾸기 위해 할리우드(혹은 일본영화)가 잘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같다. 한편 조해원은 배우 출신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역할은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에서 소냐(최은희)와 형 영식(김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동식일 것이다. 연출에 뜻이 있어 1960년대 초반부터 조감독으로 활동했고, <불나비>가 그의 감독 데뷔작이 되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성공적이었다. 정교한 이야기에 효율적인 스펙터클이 붙고 배우들의 열연까지 돋보이는 웰메이드 추리극이 등장한 것이다. “이 정도라면 외화 관객이 보아도 과히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평가를 포함해 일간지 리뷰들도 호평 일색이었다. 당시 이 영화에 대한 장르 명명이 ‘로맨스 미스터리’였던 것도 기억할 만하다. 1965년 11월 말 국제극장에서 개봉한 <불나비>는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폴 뉴먼 주연의 스파이 스릴러 <국제 음모>(1963)와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문예영화 <갯마을>(감독 김수용) 사이에서 선전해 흥행 역시 성공했다.

두 사람의 이후 행보도 흥미롭다. 김강윤은 ‘로맨스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으로 <황금의 눈>(1966)의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했으며, 조해원은 미스터리 ‘불’ 시리즈 2탄인 <불개미>(1966)를 연출했다. 1960년대 한국 장르영화 신의 기억할 만한 순간임에 분명한 그들의 열정적인 작업은, 아쉽게도 필름이 유실된 탓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시나리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녀? 귀부인? 그 여자의 정체는

호젓한 호숫가의 풍경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낚시를 하고 있는 한 남자가 원경으로 보이고 이어 오픈 스포츠카를 타고 오는 여자가 카메라에 포착된다. 차에서 내린 여자가 연인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말을 걸지만 그는 목덜미에 칼이 꽂혀 죽은 상태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모습에 이어 ‘불나비’라는 과감한 타이포그래피 제목이 등장하고, 브라스 밴드의 역동적인 음악이 관객을 영화 속으로 안내한다. 겁에 질려 무작정 차를 타고 달리던 여자는 낭떠러지를 만나 겨우 멈추고 기절해버린다. 마침 그곳에 있던 등산가 차림의 남자가 그녀를 끌어내자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화염에 휩싸인다. 화려한 액션 신으로 근사한 도입부를 만든 영화는 이제 미스터리 모드를 본격적으로 가동한다.

남자가 의식을 잃은 여자를 바라볼 때 들리는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내레이션처럼 영화는 중반까지 그녀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집중한다. 정체불명의 여인은 자신을 미세스 양이라고 소개하지만 실제 이름은 민화진(김지미)이고, 그녀를 구한 남자는 안 팔리는 변호사 성훈(신영균)이다. 화진과 성훈이 호텔 커피숍에서 처음 만날 때 한 남자가 둘을 미행하고, 둘이 호텔 방에서 키스를 나눌 때도 다른 남자가 훔쳐본다. 첫 번째 남자는 자신을 그녀의 열렬한 숭배자라고 성훈에게 소개한 한창식(박암)이고 두 번째 남자는 그녀의 이복오빠인 민병태 사장(최남현)이다.

추리극의 탐정 역할을 하는 젊은 변호사 성훈이 화진에게 빠져들수록 또 관객과 함께 그녀의 비밀을 밝혀갈수록 그는 위험에 빠진다. 밤길을 걷는 그의 얼굴로 칼이 날아오기도, 속도를 높인 차가 그를 치려고도 하고, 급기야 개떼가 쫓아오는 장면까지, 흥미진진한 액션 신들이 장르적 밀도를 높인다. 그 와중에 그녀 주변의 남자들이 하나씩 죽음을 맞는다. 가정주부로 변신한 화진과 함께 있던 깡패 문인수(박기수), 별장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던 가수(김상국)가 호숫가에서 죽은 남자처럼 목덜미에 칼이 찔려 죽는다. 그리고 성훈이 범인이라고 추측했던 민사장마저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된다.

당시 <불나비> 포스터 문구에서 “요부냐, 마녀냐, 귀부인이냐, 고독한 여인의 슬픈 몸부림”이라고 소개된 화진의 사연은 이러했다. 화진과 인수는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녀는 이복오빠 병태에게 범해지고, 충격을 받은 인수는 그녀를 떠나 깡패가 되었다. 그녀는 오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남자와 사귀는 것으로 복수한다. 하지만 민 사장은 그녀와 계속 관계를 맺기 위해 성불구자와 결혼시키고 그로부터 사업 자금까지 받는다. 민 사장이 죽은 후 성훈이 화진의 대전 집으로 찾아가면서 두 번째 비밀이 밝혀진다. 둘을 미행한 창식이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고, 그는 부인 앞에서만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는 행세를 하며 속이고 있었다.

미모의 여인 화진에게 달려들어 죽음을 맞은 남자들은 영화 제목처럼 불나비 같은 사랑을 한 것인데, 그 대단원의 막은 남편 창식이 장식한다(가장 극적인 ‘불같은 사랑’은 KMDb VOD에서 스트리밍 중인 영화 본편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 그녀 주변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남자 성훈이 화진을 구해내지만 그녀는 혼자이기를 택한다. 둘의 결합을 용인하지 않는 영화의 결말은 당시 한국 사회의 도덕률을 반영한 것이다. “전 그동안 많은 남성들과 접촉해왔어요. 하지만 전 결코 우정 이상의 것을 준 일이 없었어요”라는 화진의 고백을 통해 그녀의 방탕한 과거를 경감시키긴 하지만 팜므 파탈 혹은 죄지은 여자라는 낙인까지 지우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동명 주제가 역시 히트했다. 화진과 성훈이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출 때 가수 김상국이 직접 출연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주제가 <불나비>다. 엔딩에도 흐르는 “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이라는 김상국의 애절한 목소리는 놓치지 않아야 할 영화의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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