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5월9일
2002-05-17

편집장

“너 사는 게 힘들구나. 늙었다….”

이렇게 만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실은 좀 민망했다. 친구 상가에서 같이 운구를 했던 게 1990년쯤이니 12년 만이다.

<씨네21> 평론상 당선작을 뽑고 나서 뽑힌 사람이 1962년생이라는 걸 알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이 마흔 넘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이 사람도 속에 바람이 어지간히 많은 모양이군…. 그런데, 이름이 낯익었다. 설마 했다. 사실은 내가 아는 친구와 동일 인물일 거라는 예감이 곧바로 들었으나, 그렇지 않길 바랐다. 그런 예감이 든 이유도 그게 아니길 바란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 친구와 나는 딱히 친한 편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시대에 같은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고민을 했던 터라, 강의실에서보다는 술집에서 거리에서 좀더 자주 마주쳤고, 난 사람 좋아보이는 잔주름 많은 그의 얼굴과 처진 눈과 느린 말투를 기억하고 있었다. 살다보면, 느리게 천천히 다가와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목소리가 낮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체로, 가진 게 늘 적은 사람들이다. 공장에서 4년 동안 일했고, 동료들이 왕창 빠져나간 뒤에도 90년대 중반까지 노동운동에 관여했다는 사실말고는 그가 어떤 세월을 살았는지 난 모르고 있으나(그걸 새삼스레 물어볼 자격이나 의지가 없다), 이 친구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고 지금도 그렇게 보인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그를 보고나서(그리고 늙었다는 소리를 듣고나서) 복도에 나가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쁘거나 추하지 않은데도, 그냥 말하지 않은 채 묻어두고 갈 수밖에 없는 게 있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이 불러일으킨 지난 세월에 대한 상념들은 당분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슬픈 정리와 회고는 그 세월을 함께했던 누군가를, 아니면 고귀한 무언가를 모욕한다. 그때의 노래들이 지금 CF의 배경음악으로 나올 때, 혹은 빠른 비트로 리메이크될 때, 왠지 나도 모욕자의 대열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불편하다.

다만, 그 늙은 친구는 좋은 평론가가 됐으면 좋겠다. 그 이름 뒤에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이 붙는다는 게 아무래도 낯설지만, 그리고 그게 그에게 어떤 걸 갖게 해줄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주 작게나마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이 남은 것 같지 않다.

알립니다. 아줌마 코너를 쓰던 오은하씨가 두 번째 후예를 분만하느라, 두달간 쉽니다. 그 사이에 파출부 코너라도 마련할까 했으나, 섭외받는 사람이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아 포기하고 그냥 그 코너를 비워두기로 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두 번째 아기는 3.85kg으로 그날 빛을 본 친구 중 가장 거구였으며, 모친의 표현을 옮기면 얼굴이 ‘누운’ 달걀형으로 눈이 끝나고도 얼굴이 한참 이어진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둘다 건강하답니다. 아줌마 팬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