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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2002-05-24

편집장

다른 사람이 보는 신문을 어깨 너머로 힐끗 보다, 오늘이 5·18이구나, 생각했다. 얼마 전 4·19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 숫자의 조합이 상기시키는 기억과 상념의 무게는 아마 세대별로 다를 것이다. 나는 그걸 무겁게 상기하는 세대에 속하지만, 그 무거움으로부터 도피한 부류다.

영화는 도피처로 적당하다. 나는 <스타워즈>가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그런 판타지의 쾌감이 없으면 이 일이 도무지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에피소드1>의 레이스 장면만으로도 나는 7천원 지불을 망설이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재미없는 건 할리우드영화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말들이다. 그런 말들은 너무 뻔하게 옳아서 재미없다.

그런데 이 쾌락의 세계는 안전하지 않다. 판타지에서 다시 기억으로 결국 현실에의 회귀를 권유하며 안온한 자족적 쾌락을 뒤흔드는 것도 영화다. 켄 로치의 영화가 그랬다. 1996년, <랜드 앤 프리덤>을 봤을 때의 충격을 잊기 힘들다. 기교도 없고 형식의 혁신도 없는 낡아빠진 영화인데, 마음에서 그 영화를 지울 수 없었다.

2000년 5월, 칸 해변에서 켄 로치를 멀찍이서 봤을 때의 느낌은 기묘했다. 밤 9시까지 태양이 지지 않는 이 판타스틱한 휴양도시에 그가 들고온 영화는, 역시 켄 로치답게, LA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빵과 장미>였다. 그러나 수백개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붉은 주단을 밟고 올라가는 그의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지만, 하의는 청바지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일찍이 칸의 붉은 주단을 청바지 차림으로 밟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했다.

귀족적이고 권위적인 칸이 이상하게도 그에겐 저자세를 벗지 못한다. <레이닝 스톤> 이래 그의 신작은 벽 높기로 이름난 경쟁부문에 거의 빠짐없이 초청됐고 올해도 그렇다. 골수 사회주의자에 대한 이 각별한 그리고 분명히 불공정한 칸의 예우가 나는 기분 나쁘지 않다. 칸은 미학과 정치 사이에서 갈라져 있으며, 그 균열이 보일 때 마음이 편하다.

<씨네21>은 분열적이다. 우리의 분열은 물론 훨씬 세속적이고 복합적이다. 의미와 재미, 대중성과 선도성 등등이 미학과 정치의 대립항과 얽혀 갈라져 있다. 그 분열은 그걸 만드는 사람들, <스타워즈>와 <랜드 앤 프리덤>에 동시에 마음이 움직이는 자들의 분열의 반영이다. 그걸 균형이나 공정으로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고맙긴 하지만 오인한 것이다. 합의 길은 보이지 않으며 어느 쪽도 외면하기 힘들다. 우리의 핑계는 균열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위장이나 자기 억압을 경유한 합보다 해롭지 않거나 적어도 정직할 거라는 옹색한 자기 위안이다.

<빵과 장미>가 개봉한다. 우리는 켄 로치라는 불굴의 노인을 지지한다. 매혹적인 판타지에 대한 지지에 비해 그에 대한 지지는 턱없이 왜소하며, 그 지지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처럼 자격미달 지지자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