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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세이렌의 노래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포로로 붙잡힌다. 포로가 된 아이는 살인을 저지른 열명의 삼촌에게 둘러싸이는데, 이들을 일컬어 빅토르 위고는 ‘그의 아버지의 끔찍한 형제들’이라 칭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그 상대를 ‘끔찍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무튼 포로로 붙잡힌 아이의 이야기는 ‘구세주’를 만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다. 아이는 삼촌으로부터 도망치고, 그 과정에서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말하는 동물’과 만나게 된다. 이 신비로운 동물과의 조우 덕택에 아이는 자신이 태어났던 낙원으로 되돌아간다. 이상의 내용이 바로 위고의 서사시 <세기의 전설>에 등장하는 ‘삼촌과 대립하는 아이’ 이야기의 원형이다. 2018년 개봉했던 <블랙 팬서>에는 마치 <햄릿>과도 흡사한 아버지의 형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킬몽거(마이클 B. 조던) 캐릭터를 통해서다. 그리고 속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이하 <와칸다 포에버>)에서 다시, 킬몽거는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나타난다. <블랙 팬서> 시리즈가 유독 아버지의 형제 관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왕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와칸다 포에버>에서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은 티찰라(채드윅 보즈먼)가 아닌 슈리(레티티아 라이트)로, 순수하게 이야기의 패턴으로만 보자면 전작에 비해 훨씬 더 깊이 있게 신화에 집중한다. 사망한 제왕의 빈자리를 새로운 무언가로 대체하는 것이 이번 영화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아닌 감정에 기대어

배우 채드윅 보즈먼의 죽음을 거치면서 영화의 구상은 변화했다. 이제 ‘누가 새로운 블랙 팬서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보즈먼의 자리가 다른 이로 채워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설사 다시 폐위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그는 믿는 듯 보인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전작과 구분되는 원형 활용의 차이점이 보인다. 전편에서 비브라늄은 철저하게 왕을 왕답게 만드는 지표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다. 속편에서 이 가상의 금속은 와칸다 제국의 표식으로 이용될 뿐, 힘의 상징이 되지 못한다. 대신 영화는 ‘모성’이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들추어낸다. <완다비전>과 <이터널스>, 그리고 이번 영화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확실히 마블 페이즈4의 작품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다. 어쩌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초월적인 소명을 끄집어내어, <와칸다 포에버>는 인간 심리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주인공 슈리가 ‘과학자’라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는 인트로에서 심장 모양의 허브를 완성하려고 애쓰는 슈리를 보았다. 하지만 당시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최신 문명의 성과가 결실을 맺기 전에 오빠가 사망했던 탓이다. 그렇게 시작하자마자 영화는 포에지의 내레이션을 구사한다. 그리고 왕의 탄생과 관련한 서사의 단계에서, 한 여성의 내면은 불안으로 뒤덮인다. 과학에서 잉태되었던 이데아의 형상은, 서서히 이전의 가치관을 상실한다. 초월적이고 완벽했던 와칸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타국의 습격 때문이 아니라 왕의 부재로 인해 와칸다는 이미 무너진 상태다. 죽음에서 기인한 파생적인 형태가 그들에게 영향을 줬다. 이제 왕의 죽음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영화는 다소 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만일 당신이 <와칸다 포에버>를 선호한다면, 그건 순전히 영화가 보이는 낭만성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들의 내면은 오롯이 ‘영원에 대한 감각’에만 집중한다. 선조의 관습에 따라 망자의 옷을 불태우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천재 과학자 슈리는 자신을 바꾸려고 고군분투한다.

순수하게 슈리의 눈높이에서, 이러한 애도의 영역은 물리적인 법칙과 쉬이 결합되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두려웠을 것이다. 지금껏 숭배해온 수학의 원리가 모두 헛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그녀를 도우려 애쓰지만 그들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당한다. 때문에 영화는 또 다른 원형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바로 <세이렌의 전설>이다. 흥미로운 점은 원전에선 여성이었던 인어의 모습이 이번 영화에선 철저하게 남성적인 성향으로 분한다는 사실이다. 언뜻 단순한 도치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영화는 원형의 미적 구성을 변화시킨다. 따지고 보면 <어벤져스> 시리즈의 히어로들은 꾸준히 또 다른 형태의 ‘영웅주의’를 구현하려 헌신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궁극적으로 사회의 이해관계를 이용하면서, 현실과 충실하게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모든 개인은 정치적이다”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실제로 <와칸다 포에버> 속 미국은 강대국의 대변자일 뿐, 관객은 비서구 민족간의 대립에 집중한다. 우화의 해석은 단순해지고, 신화의 분위기만큼 극의 환상성도 높아진다.

죽음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세이렌의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욕망의 평범한 속성을 상징한다. 마치 운명처럼, 그녀들은 매혹적이고 치명적이다. 한편 <와칸다 포에버>의 바닷사람들은 원본 이상으로 물리적이다. 그들은 강인함으로 무장한 채, 섹슈얼리티와는 무관한 자본의 영역을 점유한다. 비브라늄 채취를 위해 움직이는 극중 과학자들은 이들의 이해관계를 추종하고 있으며, 관능이나 내적인 욕망이 아니라 파도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남의 것을 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로칸의 우두머리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와 슈리가 대치하는 것은 내적 투쟁의 일부처럼 읽힌다. 슈리를 딜레마로 내몰았던 과학의 영역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 충돌한다. 확실히 네이머는 슈리가 몰아내야 할 스스로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덧붙여서 리리 윌리엄스(도미니크 손)의 역할이 이 과정에서 미미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과학이 나쁜 본질로 치부되는 세계에서, 그녀는 존재감을 발하기 어렵다. 시리즈 전체에서 기술적인 긍정성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아이언 하트 캐릭터에게, 이번 영화의 가치관은 근원적으로 어긋난다.

심리학자 칼 융은 원형의 이야기가 신비감을 고취시킨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제자들은 회상을 통해 숭고함의 가치가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영화 <와칸다 포에버>의 추모 방식은 철저하게 무의식의 원칙을 따라 완성된다. 기존의 마블 유니버스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재전유하면서, 영화는 신화의 합리성을 현실과 맞닿게 한다. 덕분에 슬프지만 진실인 죽음의 영역 안으로, 시리즈 전체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와칸다라는 가상의 제국은 리부트되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관념적이고 독립적인 세계의 체계는 재건되었다. 돌이켜보면 분개와 복수는 이 영화의 몫이 아니다. 지극히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와칸다 포에버>는 고통과 열정을 승화시키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니 영화 전체가 세이렌의 노래를 부른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슈리와 라몬다(앤절라 배싯), 그리고 오코예(다나이 구리라)가 보이는 강인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신비감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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