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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문제는 동네다
김혜리 2012-09-20

<이웃사람>으로 돌아본 강풀 원작 영화의 호소력

<이웃사람>을 보고, 올이 여기저기 풀려 있지만 추위를 막는 데에는 지장없는 목도리를 떠올렸다. 이 영화에서 연쇄살인범(김성균)의 행동 동기와 연관된 디테일은 군데군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거나 뭉그러져 있다. 그래서 영화와 합을 맞춰가며 사건의 전말에 동행하고 싶은 관객의 발목을 잡는다. 거친 장면 전환은 편집실에서 이 영화가 홍역을 앓았으리라는 추측을 부추기며, 장면 이행에 가세한 CG 효과가 조야해 흥을 깨는 대목도 있다. 치밀한 스릴러가 되기엔 거멀못이 한참 헐겁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에서 플롯의 구멍은 치명적이다. 일단 “사실적 스릴러에서 설득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려준다”는 평론가 이동진의 20자평에 전적으로 공감한 다음, 나는 김휘 감독의 <이웃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상당한 쾌감을 안기는- 치명적 결함을 못 본 체할 용의를 갖게 하는- 이유를, 강풀 원작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보려고 한다.

복도식 아파트와 오지랖의 미학

강풀의 만화는 작가 본인이 독자적으로 명명한 두개의 장르(?), ‘순정만화’와 ‘심리 미스터리 썰렁 만화’로 나뉜다. 작가는 “초기에 네 그림체로 무슨 순정만화가 되겠느냐, 무슨 호러만화가 되겠느냐고 의구심을 표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역설적으로 붙여본 이름이었다”고 회고한다. 영화화된 강풀 만화 가운데 <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전자의 그룹에, <아파트>와 <이웃사람>이 후자에 해당한다. 어느 쪽에도 딱히 속하지 않는 예외는, 비평가들이 어떻게 해석하건 자신은 재미를 최우선으로 추구한다고 공언한 이 이야기꾼이 “재미만이 목적은 아니었던 유일한 작품”으로 꼽는 <26년>이다. 웹에서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강풀의 만화는 모두 영화로 만들어졌거나 판권이 팔렸다. 이 가운데 완성도와 관객의 호응 면에서 성공한 작품은 지난해 개봉한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이웃사람> 두편이다. 원작에 대한 충성도가 결코 각색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변수는 아니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이웃사람>은 강풀만화라는 강력한 텍스트의 요체를 조심스럽게 보존함으로써 목적지에 안전하게 당도한 케이스다.

강풀 만화가 지닌 파괴력과 사랑스러움의 핵심은 두 번째 장편 <아파트>에 잘 압축돼 있다. 장르가 멜로드라마건 미스터리 스릴러건 지금까지 영화로 옮겨진 강풀 만화는 모두 근본적으로 ‘동네 만화’다. 동네 사람과 연애하고 동네 사람과 친구 먹고 동네 사람을 살해하고 동네 사람을 구출하는 이야기다. 작가 본인이 삼십여년간 살아온 서울 강동구 일대 풍경을 고스란히 만화의 배경으로 수용해온 강풀은 그러잖아도 머릿속에 꿰고 있는 동네를 다시 여러 각도로 꼼꼼히 촬영한 다음 조감도를 완전히 머릿속에 넣은 상태에서 배경그림을 수작업으로 완성하고, 그 위에 컴퓨터로 그린 인물들을 움직여 웹툰을 완성한다고 작업과정을 밝힌 바 있다. 배경은 고정되고 사람이 움직인다는 설정은 현실에서 공간과 사람이 갖는 관계와 동일하다. 강풀 만화 속 공간은 오밀조밀한 옛 주택가일 때도 있고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일 경우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좋건 싫건 사람이 어깨를 스치고 마주쳐야 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설령 아파트라 해도 완벽하게 보안되고 유닛으로 단절된 아파트가 아니라, 담배를 피우다 옆집 아주머니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복도식 아파트이며 엘리베이터가 한대뿐이어서 출근 시간이 비슷하면 얼굴을 익힐 도리밖에 없는 구식 아파트이고 심지어 자동으로 잠기는 도어록이 달리지 않아 경황이 없으면 깜박 문을 연 채 외출하기도 하는 특정한 형태의 아파트들이다. 동선이 겹치는 생활공간에서 강풀의 인물들은 우연의 반복을 통해 필연속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직접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예컨대 “새벽이면 늘 잠을 깨우던” 오토바이 운전자, 하굣길에 오뎅을 팔던 포장마차 아주머니를 염려하는 단순한 인지상정으로부터, 미리 계획되거나 조직된 바 없는- 때로는 자기 앞가림도 못해온- 약자들의 연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기획되지 않았기에 그 행위로 인해 개인에게 돌아올 득실이 분명치 않은데도 감행되는 특별히 의로울 것 없던 사람들의 결단이 곧 강풀 만화의 차별적 감동을 구성한다. 스릴러의 경우, 한정된 공간에서 조밀하게 교차하는 타임라인과 동선이 견고한 서사의 뼈대가 된다(“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도시 호러”라는 컨셉만으로도 충분했던 영화 <아파트>가 구태여 강풀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점이 의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아파트>에서 주인공 세진과 그녀가 구하려는 소녀 유연의 관계는 상식적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제 코가 석자인 백수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타인의 안위를 염려해 행동할 수 있다는 강풀 만화의 대담하고도 핵심적인 전제를 영화 <아파트>는 “그럴 법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웹툰과 영화의 온도 차이

추창민 감독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강풀 원작의 각색 작품 가운데 영화적으로 주인공 네 노인이 일하고 생활하는 동네의 지리와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가장 명료하게 스크린에 옮김으로써 관객이 점점 긴밀해져가는 인물들의 관계에 젖어들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웃사람> 역시 강산맨션과 주변의 배치도를 무리없이 납득시켰다. 스릴러로서 <이웃사람>은 원작 만화처럼 촘촘히 사건 전개 일지를 명시하지 않는데 이것은 영화 매체의 속성이 낳은 결과다. 스크롤을 하며 한 프레임씩 읽어내려가는 웹툰의 양식은 자연스럽게 필름의 띠를 연상시키는데 한 프레임에 몇초 머물지를 독자가 부단히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 영화와 다르다(각 컷에 일률적 시간을 머물게 하는 자동 스크롤 기능을 이용해보면 웹툰을 감상하는 재미가 반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화의 독자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는 시각적 상상력을 활성화한다면, 주어진 실사만을 보는 영화 관객은 극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데에 있어 훨씬 유연한 상태에 있다.

만화의 독자가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의 밀도에 훨씬 관대하다는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바보> <순정만화> 등 ‘순정만화군’에 속하는 강풀 만화를 각색했던 영화들이 관객을 다소 뜨악하게 만든 원인도 눈에 들어온다. 가족애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강풀의 ‘순정만화’들을 살아 숨쉬는 배우의 몸을 빌려 스크린에 옮길 때는 일종의 ‘톤 다운’이 필요하다. 원작의 선하고 애틋한 에피소드, 반복을 통해 눈물을 끌어내는 대사가 관객과 같은 세계에 실존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순간 거기에는 불가피하게 작위성이 얹히게 된다. 닭살스럽고 가식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기묘하게도 이러한 매체 사이의 온도 차이는 스릴러 <이웃사람>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김휘 감독이 플롯의 구멍을 메우기를 포기하고 대신 선택한 것은 확대된 얼굴이다. 870호 ‘신전영객잔’에서 김영진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김성균 배우가 연기하는 연쇄살인범 류수혁에게서는 원작의 류수혁이 만화의 그림칸 안에 존재함으로써 태생적으로 두르고 있던 ‘신비로움’이 발가벗겨져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동석이 분한 안혁모는 야비하고 폭력적인 동시에 기본적 의협심을 갖춘 남자가 어떤 모습인지 원작보다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한편 여성 인물들, 희생자인 소녀 여선(김새론)과 새엄마 송경희(김윤진)의 경우 육체성은 감상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거친 것은 더 거칠어져 악을 때려눕히는 카타르시스를 제고하고 연한 것은 더 연해져 회한을 부채질함으로써 증폭된 정서가 스릴러의 허술한 관절을 덮어주는 형국이다.

연대에서 개인(들)이 내리는 윤리적 결단의 교차로

김영진 평론가는 같은 글에서 “(죽은 여선의 새엄마인) 송경희가 자신의 잃어버린 딸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아가 같은 동네에 사는 선한 꼬마에게도 배려의 손길을 뻗을 수 있게 되는 그 갱생의 에너지가 다른 인물들로 퍼져나가게끔 하는 기세가 약하다”고 썼다. 나는 이 관찰에 동의하는 동시에 이 점은 강풀의 원작에도 드러난 전작들과의 차이이고 원작 만화와 영화가 공유한 장점이라고 본다. 등장인물들이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 같은 적을 상대하거나 목표를 추구하는 잠재적 동지를 발견하는 <아파트> <타이밍>과 달리 <이웃사람>의 강산맨션 주민들은 막판에 이를 때까지 누구의 동조도 없이 자기 혼자만 류수혁을 의심하고 있다고 믿으며 누구의 동조도 없이 혼자 갈등하고 판단하고 혼자 싸운다. 이것은 연대라기보다는 개인이 개별적으로 내린 윤리적 결단의 교차에 가깝다. 그런가 하면 <아파트>의 가해자가 죽음에 이르는 고독으로 원혼이 된, 즉 나쁜 세상의 첫 번째 희생자라면 <이웃사람>의 연쇄살인자는 소시오패스, 환자다. 말하자면, 류수혁은 우리 중의 하나가 아니다. <26년>의 ‘그’를 제외하고 이런 예는 강풀의 세계에서 아주 드물기에, 2008년작인 <이웃사람>이 보여준 이러한 변화는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당시 한국사회가 경험한 광범위한 절망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짐작마저 부추긴다. 폭력과 폭력이 충돌하는 클라이맥스가 도래하기 전까지, 전례없이 헐거운 동맹으로 연결된 <이웃사람>의 인물들이 쓰는 유일한 무기는 시선이다. 그들은 그저 계속 눈치를 채고 지켜볼 뿐이다. 살인과 무관한 계기로 류수혁을 때리는 안혁모의 행동이 그토록 관객을 통쾌하게 만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인물간 연대의 수준을 낮게 잡은 <이웃사람>은 우리의 ‘시선’에 마지막 희망을 거는 것이다. 원작과 비교해 김휘 감독이 유독 힘주어 표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송경희가 죽은 딸을 닮은 소녀 수연을 버스정류장으로 마중나가 지켜내는 순간이다. 흉기를 들고 따라오는 류수혁을 뒤에 두고 경희가 택하는 방어수단은 소녀를 끌고 차도로 내려서서 행인과 운전자들의 시선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행위다. 타인의 시선은 돌연 든든한 울타리로 변한다. <이웃사람>은 그렇게, “적어도 우리가 지켜보는 한은 괜찮다”고, 당신이 지금 안전하다면 누군가가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김휘 감독은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통상적 의미의 앙상블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집단 주인공이라는 강풀 원작의 특수성을 살리고, 작품의 심장과 직결되는 ‘혈’에 영화적 방점을 찍는 데 성공했다. 강풀은 다중 서사의 귀재이지만 그의 시점은 뭇사람보다 우월하거나 심판의 권력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실 속 보통 사람보다 넓은 시야를 갖되 신의 전지적 시점보다는 낮은 고도에 자리한다. <이웃사람> 도입부의 부감 롱숏 윗부분에 걸린 ‘어린이 보호구역’ CCTV의 시점은 그러므로 강풀과 김휘 감독이 선택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앙금까지 삼키진 못한 스크린

어느 웹툰보다 대중에게 폭넓게 소구한 강풀의 만화에는 극히 비주류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결말의 진득한 앙금이다. <아파트>의 용감한 주인공 고혁은 이타적 행위의 보답으로 좋은 직장에 취직해 계속 선량한 시민으로 삶을 영위하기는커녕 구하려고 한 대상의 고통을 받아안는다(이를 두고 웹툰의 한 독자는 “귀신 도우려다 더 독한 귀신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댓글을 썼다). 저승사자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통을 넘긴다. 죄책감을 족쇄처럼 차고 공소시효 만료를 기다리던 <이웃사람>의 표종록은 10일 주기 연쇄살인범 류수혁을 응징함으로써 원작자의 표현을 빌리면 “15년 주기의 연쇄살인자”가 될 거라는 암시를 남긴다. 모순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고 고통은 유전되며, 그것을 치유하려는 소망도 함께 유전된다. 강풀 작가는 이 문제를 묻는 내게 “고통의 총량은 변치 않은 채 세상 속을 흘러다니지만… 그러면서 희석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영화 <이웃사람>은 표종록의 에필로그를 생략함으로써 끝없는 싸움을 암시하는 이 무시무시한 잔여감은 스크린 밖으로 배제한다. 여기까지 쓴 나는 뜬금없이 깨닫는다. 지금껏 내가 왜 실질적 ‘혈연’이 전혀 없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플란다스의 개> <괴물> <마더>- 을 보면서 강풀 만화와의 친족유사성을 느꼈는지. 아, 뭐 이런 썰렁한 결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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