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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남기다

내용에 부합하는 3D효과가 남긴 깊은 인상, <라이프 오브 파이>

얀 마텔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진 못했으나 리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영화화된 것 자체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영화는 찍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이라는 명제를 이 영화만큼 잘 입증하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주인공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망망대해에 표류하면서부터, 영화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의 관계만을 담는다.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이 붙은 이 호랑이는 좁은 보트 안에서도 엄청난 기세를 잃지 않는다. 허겁지겁 보트에 밧줄을 대고 급조한 뗏목을 띄워 물속에서 생활하는 파이는 생존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 벵골 호랑이는 다르다. 조금 불편해 보이기는 해도 그는 보트 안을 맹렬하게 뛰어다니며 심지어 먹이를 찾아 바닷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초현실적 광경이 스크린에 물리적인 환영으로 재현될 수 있는지 나는 난생처음 영화를 대하는 관객처럼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모험담은 스토리가 끝난 뒤 관객을 바다 깊숙이 끌어내려버릴 듯한 앙금을 남긴다. 깊은 슬픔이라고 할까, 이런 대작 규모의 판타지에선 금기시할 만한 성찰의 무늬가 진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 파이 못지않은 깊은 혼란을 느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이별은 전혀 극적이지 않으며 허망하기 그지없는 상태로 치러진다. 227일이나 망망대해에서 파이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리처드 파커는 멕시코 어느 해변에 도착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글 속으로 사라진다. 정글 앞에서 잠깐 서 있던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에 주인공 파이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파이는 그가 돌아보지 않은 것을 슬퍼한다. 우리도 그의 슬픔에 이입된다.

이유가 필요한 인간, 그저 무심한 자연

영화 내내 파이는 리처드 파커라는 짐승에게 끊임없이 인간의 감정을 입힌다. 자신이 파커에게 그런 것처럼 파커도 자신에게 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추측하고 기대한다. 파커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파이는 파커의 먹이를 마련해주고 파커와 어쩔 수 없는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영화 속 파이의 내레이션대로, 파커가 없었으면 파이도 그만한 세월을 바다 위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파이에게 파커는 심정적으로 친구이다. 그런데 파커는 그런 파이를 심상하게 대한다. 파커가 파이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을 순간에 그러지 않은 것은, 파이가 멋대로 상상하는 대로, 그에게 우정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파이는 끊임없이 파커에게 말을 걸고 파커가 알아들을 만한 신호를 파커가 몸으로 습득하게끔 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게 파이와 파커 사이에 소통이 성립되었다고 볼 정황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파이는 호루라기 소리로 파커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걸 멈추는 데 성공하는데, 이 간단한 자극반응의 시뮬레이션 효과가 발휘되는 것은 꽤 오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요컨대 파이가 인간의 감정으로 이입하려던 파커와의 관계는 성공하지 못한다. 파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야생의 짐승으로 바다 위에서 살았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하나도 슬플 일이 아니다. 파커는 파커대로 자신의 존재요건에 따라 살았을 뿐이며, 그런 파커에게 파이가 동정이나 연민을 느낄 처지도 아니었고 우정을 실감할 형편은 더욱 아니었다.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 이 맹수에게 파이가 느낀 우정 비슷한 감정은 일방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고로, 파이의 마음에 실연 비슷한 감정은 애초에 생겨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가 <정글북>과 같은 제국주의 담론의 지류에 있는 스토리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실감하며 조성희의 <늑대소년>과 같은 부드러운 판타지와도 대척점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이 힘겹게 공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다. 그들은 정말 힘겹게 공생한다.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 파이는 천재적인 기지를 끊임없이 발휘해 자신도 살고 파커도 도와주는 온갖 생존술을 바다 위에서 고안하고 실행에 옮긴다. 파커는 파이의 지능과 맞먹을 만한 지혜는 없지만 파이가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맹수의 강인함으로 파이보다 훨씬 굳건하게 자연의 악조건을 버틴다. 늘 혼잣말을 하는 파이와 달리 파커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 서로 개별자로 떨어져 별개의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파커는 파이만큼 아쉬움이 없다.

파이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을 불어넣고 뭔가 이름을 붙여 구획짓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선악의 도덕관념을 비롯해 매 순간 윤리적인 동요가 오는 순간에도 인간은 이유를 만든다. 파이가 그렇게 한다. 다만 파이도 연약한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는 그 자신이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인간사의 현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신에게 의탁한다. 그는 지구상의 숱한 종교를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이다. 동시에 그가 믿는 신의 섭리를 다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파이가 부서져가는 배에서 절규하는 것처럼 파이는 자신이 믿음을 바쳤던 신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 신은 전능하지만, 그래서 신에게 모든 걸 바쳤지만 계속되는 시련을 겪으면서 파이는 따지고 싶다. 그런 파이의 모습을 호랑이 파커는 무심한 눈길로 바라본다. 호랑이는 파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애초에 그런 생각의 프로그램이 입력돼 있지 않은 존재이다.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입장에서 보면 파이의 입장에서 본 우리의 모험담은 그냥 살아지는 과정일 뿐이다. 영화 초중반 처음 파이가 바다에 표류할 때 파이 옆에는 원숭이와 얼룩말이 있었다. 남을 해치지 않는 이 동물들과 있었던 것도 잠깐, 보트 천막 아래에서 하이에나가 튀어나온다. 그 세 동물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파이는 희망을 가져보는 듯하지만 이윽고 하이에나는 다른 두 동물을 무자비하게 난자해 파먹는다. 파이는 절망한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 느낀 그 절망은 파이의 절망이며 다른 동물들의 절망은 아니다. 거기에는 선악의 개념이 없다. 하이에나는 나쁜 놈이고 원숭이와 얼룩말은 선한 게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을 뿐이다. 굳이 프로그래밍한 주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신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도덕이나 윤리에 기초한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나면 우리 앞에는 순수하게 현상만이 남는다. 우리의 관념으로 세상을 다 해석할 수는 없다. 자연의 순리는 우리의 도덕관념과 무관하게 돌아간다. 우리로선 섭섭하지만 그건 신이 역사하신 일이기도 하다. 신의 섭리 역시 우리의 관념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이고

영화 말미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파이에게 일본의 보험사 직원들이 찾아온다. 그들이 서류 작성용으로 요구한 진술 양식에 파이의 체험담은 들어맞지 않는다. 파이의 체험담은 그들에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초현실의 판타지로 들리는데 그 얘기가 우리 인간의 관념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는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원숭이를 잡아먹은 이야기를 빙 돌려 포악한 주방장과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로 바꿔 얘기하는데 보험사 직원들은 그제야 납득한다. 플래시백 형태가 아닌, 병상에 누워 진술하는 파이의 모습을 길게 화면에 잡는 연출로 묘사된 이 거짓 진술 장면은 그때까지 우리가 이 영화의 모험담에 기대하던 모든 관념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하이에나의 살육 스토리에는 없던 것이 주방장과 어머니의 슬픈 비극적인 스토리에는 생겼다. 도덕관념과 선악의 대립, 그에 따른 감정의 잉여물들이 남았다. 이것은 인간의 스토리이다. 인간의 스토리이며 인간이 지어낸 스토리이기 때문에 보험사 직원들은 파이의 거짓 진술을 믿었다. 노파심 때문인지, 리안 감독은 파이의 입을 빌려 다시 한번 그 거짓 진술의 교훈을 새삼 강조한다. 파이는 스토리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신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연결해 말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스토리, 신이 역사한 스토리는 우리의 관념 바깥의 다른 패러다임에 있는 것이다. 이건 믿고 안 믿고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판단하고 받아들이느냐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자연은 위대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냥 자연일 뿐이다.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바다에서 표류한 파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집채만 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와 미어캣이라는 특이한 동물이 사는 신비의 섬이었다.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자연현상과 생물을 볼 때마다 파이는 넋이 나가지만 그것은 판단이나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개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미어캣이 사는 신비한 섬은 밤만 되면 모든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으로 변한다.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뛰어놀던 호수에는 물고기 사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낮에 평화롭게 섬의 땅을 뒤덮었던 미어캣들은 파멸을 부르는 섬의 밤 토양을 피하기 위해 모두 나무에 올라가서 잔다. 그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어진 조건에서 그대로 살 뿐이다.

인간은 누구한테서나 동일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품지만 실은 동일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이 자연계에서 가장 박약한 존재이다. 그들은 동일자가 되는 것을 정복이나 소유나 기타 유사 관념과 혼동한다. 기브 앤드 테이크의 공식에 충실하며 자신들의 잣대가 자기 쪽으로 늘 기울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이상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감정적 클라이맥스 장면,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무심하게 정글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 주인공 파이만큼 슬프지 않게 되었다. 리처드 파커는 리처드 파커답게 행동한 것이다. 그게 그의 존재 조건이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리처드 파커는 리처드 파커일 수 없다. 리처드 파커가 그 대목에서 파이에게 알은체를 한다는 것은 파이의 기대이며 바람일 뿐이다. 그 기대와 바람을 우리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판타지는 우리의 이성과 관념과 정서로 접수할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의 기대와 바람과는 전혀 동떨어진 형태로 존재한다고, 그게 실은 현실이지만 우리가 판타지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힘겹게 공생을 모색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이 영화의 3D 테크놀로지는 자본의 욕망에 따른 것도, 그에 따른 스펙터클 효과를 노린 것도 아닌 지극히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에 부합하는 것이다. 관객에게 스크린의 물체가 다가오는 서프라이즈 효과가 적재적소에 쓰이지만 이 영화에서 강조되는 3D 효과는 모두 전경과 중경, 혹은 전경과 중경과 후경에서 서로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존재하는 것의 개별성을 강조한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좀처럼 하나의 면에 존재할 수 없듯이, 파이가 스치듯 조우하는 삼라만상과 결코 한면에서 놀 수 없었듯이 우리는 다른 면에서 그렇게 서로 떨어져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그게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면서도 놀라운 균형을 이루게끔 조율하는 것이 리안 감독의 연출의 힘이다. 어떤 소재를 다루어도 실패한 적이 없는 이 괴물 같은 천재성의 소유자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 이르러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 자체를 겸손하게 반성하게 만드는 사고의 깊이를 보여준다. 거기 스며 있는 깊은 체념은 패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될 수 없는 슬픔의 척도를 면밀히 잰 끝에 정반대의 지점에서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게 만든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슬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애초부터 하나가 될 수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은 굳이 판단하지 말고 각자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힘겹게 공생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애초부터 슬픔을 초래하지 않고 더 큰 슬픔을 방지하는 일이다. 아니, 슬픔이라는 패러다임 자체도 없애는 것이 급선무일지 모른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이제 중년이 된 파이는 귀가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언젠가 모 신문의 인터뷰에서 6.25전쟁 통에 전날 가족이 죽었어도 쌀집에 가서 쌀을 사오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언급한 적이 있다. 문학은 그런 일상, 지속되는 삶, 변치 않는 산하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하여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후대에 잊혀지겠지만 조국의 산하를 위해 만주로 떠나는 주인공들을 그린 박경리의 <토지>는 생명력이 오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통찰을 빌리면 우리의 관념은 유한하다. 지속되는 것은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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