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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군중의 기억으로 ‘따고 들어가’다
정한석 2013-02-07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은 어떻게 우리의 리얼리즘이 되었는가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이 이처럼 환영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 갑작스런 문화적 신드롬은 많은 해석들을 끌어냈다. 가장 지배적인 해석은 대선 정국 직후 패배감과 허망함과 상실감에 젖어 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위안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유권자 중 상당수가 투표에 참여했고 투표에 참여한 사람들 중 절반이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바꿔 말하면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원치 않았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가 담긴 <레미제라블>을 보고 위안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대개 후자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가 우리의 현실과 어떤 방식으로건 연관을 맺고 있다는 데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현실과 맺은 관계를 말하는 데에 위안이라는 개념이 과연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르다. 따라서 대부분이 하고 있는 것처럼 <레미제라블>이 어떻게 위안의 텍스트가 되었는지 그 요인을 해명하러 나서는 것 대신, 우리는 왜 이 영화로 현실의 위안이라는 가설을 제공하게 되었는가에 더 관심이 간다. 나는 위안받았다고 느끼는 그 사회적 가설에 대한 영화적 가설을 제공하는 쪽을 택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잘 말해지지 않은 한 가지를 먼저 통과해야만 하는데, 그건 뮤지컬영화의 장르성이다.

음악이 이야기보다 즉각적인 감흥을 고취시킨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식이다. 혁명을 할 때에도 구애를 할 때에도 음악이 이야기보다 위대하다. 음악은 유독 인과가 아니고 흥이며 이성에서 먼 감정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좀 안되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뮤지컬이라는 영화 장르에서 말이 좀 안되어도 괜찮다는 건 거의 이 장르의 진실에 가깝다. 뮤지컬은 애초부터 초과하고 과잉하는 장르로서 태어났다. 서사적 인과에서 가장 자유롭고 혹은 방탕하기까지 한 영화 장르이며 그 초과와 과잉으로 인한 인공적 미학이 뮤지컬의 위안의 핵심이다. 현실적으로 인정받는 선의나 도덕의 완수성과도 무관하게 그 자체로 낭만을 즐길 때 유토피아가 형성된다고 믿게 되는 장르다. 미국의 평론가 리처드 다이어는 “엔터테인먼트와 유토피아”의 성격에 대해 기술하기도 했다. 이때의 유토피아는 체제의 이상향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행복한 느낌을 주는 상태의 그 어느 곳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현실적 인과관계와의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뮤지컬영화는 다음과 같은 정의에도 부합하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의 지배미학인 극적 리얼리즘이 널리 영향력을 떨치는 와중에도 적어도 두 가지 예외적인 장르가 있었다. 그것은 뮤지컬 코미디와 만화영화였다.” 이렇게 말한 이론가 로버트 스탬은 한 가지를 더 지적한다. “뮤지컬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브레히트 및 좌파적 아방가르드와 연관짓는 거리두기 장치들을 흔히 사용해왔다.” 더 나아가 뮤지컬 장르는 “어떤 한 감독의 천재성이 아니라 이 매체에 고유한 천재성”(에이드리언 마틴)을 지닌 것으로도 지지받는다. 이때의 핵심은 쾌락도, 자기 반영성도, 진보적 미학의 가능성도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감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미제라블>을 생각할 때 이상한 점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우리의 수용을 생각해보면 <레미제라블>은 이상의 뮤지컬 전통에 속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현실을 잊고 벗어나게 하기는커녕 그 내용상 현실을 상기시키는 면모가 있다, 고들 한다. 또 그 전제 위에서 우리가 위안이라고 말한 그 사회적 가설도 넘치게 제기되고 있다. 한 창작물과 사회의 모습 사이에 관계지을 만한 유사성이 있다는 뜻일 텐데, 하나의 창작물이 현실을 상기시키는 유사한 재현으로 인정받을 때 우리는 그 작품의 층위를 리얼리즘에서 종종 말하게 된다. 그러니 더 이상한 일이다. 초과와 과잉을 태생적 운명으로 지녀서 리얼리즘과는 가장 동떨어진 것으로 규정되어왔던 이 장르의 가장 최신의 작품 한편이 여기에 왔을 때 이 작품은 놀랍게도 뮤지컬 장르가 그처럼 많이 완성시키는 대중적 판타지나 미학적 형식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편인 리얼리즘의 자장 안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춤 없이 진행된 송스루 방식과 인물 중심의 서사

혹시 극적 리얼리즘 내지는 서사적 리얼리즘이 뮤지컬영화치고는 드물게 <레미제라블>에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에 가장 지배적이며 분명해 보이는 대답도 그와 관련이 있다. 영화 속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는 젊은 혁명가들의 실패의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의 이야기를 불러냈다는 대답이다. 그런데 일단 그 답은 잠정적으로만 옳다. 이때 ‘극’(서사)과 ‘리얼리즘’이 양분될 수 있음을 감안하는 동시에 이 영화의 서사성이 정교함이 아니라 강력함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두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말하자면 <레미제라블>에는 정교한 서사성 대신 강력한 서사성이 있다. 그리고 지난 수년간 우리를 찾은 할리우드 뮤지컬영화들과 비교해볼 때 그 강력한 서사성과 연관하여 <레미제라블>에는 있거나 없는 것이 있다.

<레미제라블>이 일종의 대중적 오페라라는 점에서(무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제작진은 스스로 그 작품을 팝 오페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송스루(대사를 노래로 하는 방식)를 택했다는 점에서 많은 오페라의 내용들이 그렇듯이 <레미제라블>의 서사성 또한 강력하다는 사실은 더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송스루 방식을 택한 드문 무대 뮤지컬 중 하나가 <명성황후>라고 하는데, 어쩌면 한 나라의 국모가 외국 적의 칼을 맞아 죽어가는 이 역사극은 아마도 웅장한 오페라적인 성격에 가장 유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적 전통에서 본다면 송스루의 양식이 오페라의 전통이라고만 말하긴 어렵다는 점이 남는다. 예컨대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 뮤지컬 영화감독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은 송스루의 방식을 택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성은 사실 거의 강조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자크 드미의 영화에는 있지만 <레미제라블>에는 없는 것을 한번쯤 지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뮤지컬영화인 <레미제라블>에는 뮤지컬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춤이 없다. 오페라적인 방식을 따라서 그렇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이 부재의 의미가 가리키는 바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적어도 영화에서 뮤지컬이 엔터테인먼트이자 유토피아일 때 가장 큰 기능을 했던 건 음악(노래)만이 아니라 춤이기도 했다. 춤에는 무엇보다 의미가 없다. 기호화할 수는 있지만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며 즉흥적이어서 자유롭다. 비서사적이다. 많은 할리우드 뮤지컬들은 얼마간의 서사를 진행시킨 다음 그 서사를 멈춰 세워놓고 춤을 추거나 노래를 진행한다. 춤이 하나의 신을 형성했을 때 그 뮤지컬영화는 의미적 세계와 비의적 세계의 교차를 통해 서사적 시간과 감각의 시간을 교차로 누리게 한다. 춤이라는 감각은 엄연히 서사의 시간을 거스르거나 중지시킨다. 그런데 프랑스 무대 뮤지컬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영화에도 도입된 결과, <레미제라블>은 춤의 신을 제외한 다음 송스루라는 방식으로 노래의 시간만을 연장한다. 그 노래들의 적지 않은 분량들이 대사를 대신하므로 서사의 성격은 끊이지 않고 내내 강조되기까지 한다. 서사적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인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 이미 구분한 ‘강력한 서사성’과 ‘정교한 서사성’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 자체가 대하 서사물이기는 하지만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는 실제로 그 원작의 서사 중 소수의 분량만 가져왔다. 이 영화는 훌륭한 이야기꾼의 그것이 아니며 서사의 성과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너무 단순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강력한 서사성을 뒷받침하는가. 무대 뮤지컬 평론가 앤드루 램은 이 논의에 중요한 징검다리 하나를 놓아준다. <레미제라블>의 무대화를 계획한 영국 제작진이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영국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사건들 대신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이다. 서사를 간소화하고 인물을 크게 만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도 서사의 흐름에서는 무대 뮤지컬과 거의 차이없이 이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서사의 굴곡보다도 장발장, 자베르, 판틴, 코제트, 마리우스, 테나르디에와 그의 아내라는 인물이 각각의 방점이다. 영화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몇개의 막으로 나뉘어 유구한 세월을 흘러가는 서사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은 그 막이 전환될 때마다 주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사건이라기보다는 어떤 중요 인물의 등퇴장이다. 이것은 뮤지컬 장르이기 때문에 허용된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장마다 주요한 곳은 그 막의 주인공들이 독창을 부르거나 합창을 부르는 곳이다. 장발장도 판틴도 코제트도 마리우스도 에포닌도 그들의 독창과 합창의 시간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초점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대개 중요하게 본 것은 사건의 연속성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방점이며 서사성의 강화는 서사 그 자체를 넘어서 인물성의 강화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 인물을 강화하는 것이 곧 서사의 강화가 아닌가 하고 묻겠지만, 아니 그렇지 않다. 이건 뮤지컬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서 제기한 근거들 이상으로 사실은 여기에 비서사적인 것의 힘이 은연중에 활개친다는 것에 이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이 영화의 주어진 서사를 더욱더 강력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현실세계와 그 서사가 깊이 관계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 기여하는 이미지적인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대표적으로 그것은 인물의 관상으로 대표되는 이미지들이다. 이 영화가 뮤지컬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리얼리즘의 자장으로 들어온 데에는 극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그러한 다른 리얼리즘의 작동이 더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뮤지컬에 리얼리즘’이라는 층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층위는 이 영화가 인물들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표현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뮤지컬의 리얼리즘’이라고 하지 않고 ‘뮤지컬에 리얼리즘’이라고 쓴, 이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의 고안은 원래 뮤지컬영화에는 리얼리즘이 관여하는 바가 전무한데도 불구하고 <레미제라블>이라는 이 한편의 뮤지컬영화의 경우에는 리얼리티에 대한 강박이 유독 덧붙여져 있어서 그것이 리얼리즘의 자장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린 지금까지 그 리얼리즘이 극적 리얼리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지 물었고 일부는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는 셈이다. 극적 리얼리즘이 아닌 ‘뮤지컬에 리얼리즘’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려나간 앤 해서웨이의 머리칼과 클로즈업

<레미제라블>을 본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맡겨놓은 딸 코제트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 다니다가 결국에는 쫓겨나 창녀가 된 판틴이 독창을 부를 때 관객인 우리는 눈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한다. 물론 앤 해서웨이의 연기가 훌륭했다. 훌륭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연기가 삶의 벼랑에 몰린 끔찍하고 헐벗은 감정을 온몸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말해도 그 장면은 아름답지 않고 끔찍하다. 매우 사소하게 들리겠지만 주의 깊게 경청해주기를 바라면서 말하자면, 나로서는 그 장면에서 한 가지가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자기의 테마곡을 부를 때 앤 해서웨이는 자신의 머리칼을 실제로 자르는 걸 택한다. 앤 해서웨이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정말’ 잘려 나가는 것이 놀라웠다. 가십 기사에나 등장할 만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 장면은 할리우드 여배우의 과감한 선택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인공적 장르에 들어선 리얼한 물리적 충격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한다. 앤 해서웨이의 머리칼이 잘려나갈 때 순간이라도 흠칫 놀란 것은 오직 나뿐인가. 당신도 놀랐다면 그건 무엇에의 충격으로 놀랐을까 하는 것이다. 앤 해서웨이의 머리칼이 잘릴 때 그 육체적 훼손의 리얼한 시도가 뮤지컬 관객의 익숙한 시각성을 뒤흔들어 놓으며 딴생각을 불러온다. 딴생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뮤지컬의 흐름이라는 그 공고함에 갑자기 현실의 물리적 가해라는 리얼리티가 관객인 우리의 눈을 사로잡아 샛길의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앤 해서웨이는 아름다운 배우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그녀는 예의 아름다움을 유지하지 않는다. 혹은 못한다. 꾸며진 헐벗음이 아니라 실제로 위협적인 리얼리티를 택해서 그녀의 얼굴은 더 헐벗고 더 끔찍해 보인다. 많은 뮤지컬에서 슬픔과 고뇌와 가난함을 겪는 인물들이 표현되어왔지만 그 표현을 위해 영화의 한 인물이 육체적 리얼리티에 이 정도의 방점을 찍는 걸 선택한 경우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대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의 비참함이란 판틴의 이야기와 그녀의 노래로서 전달되겠지만,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에서 판틴의 비참함이란 바로 이와 같은 앤 해서웨이의 헐벗은 얼굴의 리얼리티라는 시각적 충격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녀의 얼굴의 리얼리티를 계기로 돌아보면 이 영화의 라이브 녹음 형식이 가장 상급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저런 정보를 통해 이 영화의 배우들이 통상 연기와 녹음을 따로 하는 것과 다르게 현장에서 직접 연기하며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형식을 택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이끄는 효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걸까. 감독 톰 후퍼는 그와 같은 라이브 방식을 취한 이유에 대해 “스토리의 리얼리즘”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잘못 표현한 것 같다. 배우가 현장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서사의 리얼리즘이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감독 톰 후퍼보다 더 경청할 만한 말을 한 건 마리우스 역을 맡은 에디 레드메인이다. 그는 통상의 뮤지컬에서 배우가 두 번 연기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 미리 녹음실에서 노래를 녹음하고 몇달 뒤 현장에 와서 입을 맞출 때 연기하는 자신의 감정의 괴리감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말한다.

이 부분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유머는 할리우드 고전기의 대표적인 뮤지컬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의 두 여배우가 한 사람은 무대 앞에서 입을 뻥끗거리면서 노래 부르는 흉내를 내고 사실은 또 한명의 여배우가 무대 뒤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실제 노래를 하는 장면이다. 그 때 몸과 목소리의 분리가 웃음을 유발한다. 감독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는 배우의 육체와 목소리가 동떨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는 배우에게 당신이 무슨 대사를 하건 성우가 나중에 더빙을 할테니 그냥 일, 이, 삼, 사라고 말해도 좋다고 했다. 스트라우브/위예에게 중요한 건 육체와 목소리의 일치였고 펠리니에게 중요한 건 몸과 목소리의 일치가 아니라 어떤 목소리가 저 몸을 덮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선택은 영화의 진실이 아니라 일종의 미학의 선택이며 <레미제라블>은 몸과 목소리의 일치라는 영화적 선택을 한 것이다. 저 몸에서 저 목소리가 지금 나오고 있음을 증명하기. 그리고 그걸 가장 확실하게 입증하기 위해 이 영화가 시각적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그토록 많이 말해지고 있는 클로즈업이다.

간과되어온 핸드헬드 기법이 창조한 리얼리티

영화평론가 듀나가 이 영화에 관해 지적한 “클로즈업이야말로 가장 영화적이면서도 노래하는 배우를 잡아낸다는 뮤지컬의 목적에 부합하는 도구이다. 게다가 이는 라이브 노래라는 드문 시도를 하는 배우들에게 엄청난 이득을 준다”와 “강렬함의 상당 부분은 관객이 지적하는 클로즈업의 남발과 같은 불완전한 장치에서 나온다”는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클로즈업이 “<레미제라블>의 골수팬들이 영화를 보고 ‘이런 건 처음 봤어’라고 말하도록” 하기 위해 선택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클로즈업은 무대 뮤지컬을 옮겨오는 과정에서 영화가 자신만의 능력을 뽐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만약 영화적으로 다르다는 걸 뽐내고 싶었다면 왜 송스루 방식은 고수하는 걸까. 같은 송스루 방식이지만 팀 버튼이 연출한 뮤지컬영화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를 보면 숏의 결합이나 신의 결합이 영화의 방식대로 이미 완결성을 갖고 있으며 노래의 자리는 그 전제 위에서 곳곳에 입혀졌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그 반대의 인상을 받게 된다. 영화적으로 어색해지더라도 무대에서 배우들이 직접 부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라이브를 보존하고 그것에의 리얼리티 체크를 위해 얼굴의 클로즈업을 연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클로즈업은 무대 뮤지컬을 최대한 모방하여 스크린에 옮겨내고자 고민한 과정에서 선택하게 된 영화적 방식이라 추론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예기치 않은 효과를 갖고 왔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무대 뮤지컬 관람의 조건과 극장 관람의 조건은 다를 수밖에 없다. 둘은 정확히 일치할 수 없으므로 그렇다면 무대가 스크린으로 옮겨졌다는 환상을 주는 것이 필요해진다. <레미제라블>은 시선의 거리와 크기를 조절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걸 클로즈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대 위의 뮤지컬을 본다 해도 그때 우리의 시선은 객관적 거리를 넘어 나름대로의 환상을 갖고 있다. 클로즈업은 무대를 볼 때 객석의 관객이 갖게 되는 그 시선의 자기 환상성을 영화가 리얼하게 재현해내려 하면서 선택된 것이다. 이를테면 오페라의 관객이 종종 망원경을 사용하여 스스로 시선의 클로즈업 효과를 내려 애쓴다는 사실을 우린 생각해야 한다. 무대를 보는 관객이 바라는, 더 가까이, 더 크게라는 리얼리티를 더 강력하게 완수하기 위해 영화적 리얼리티가 필요했고 그 리얼리티를 위해 클로즈업이 쓰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영화가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사회상과 연관시키는 리얼리즘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말인가. 클로즈업만큼 이 영화에 주요하게 쓰이는 한 가지를 더 첨언하며 그걸 말해야겠다.

의아하게도 <레미제라블>을 말할 때 클로즈업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만 핸드헬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클로즈업을 영화 현장에서 말할 때 스탭들은 ‘따고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딴다는 건 감정을 크게, 들어간다는 건 거리를 가깝게라는 뜻일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이 클로즈업에 내린 두 가지 정의, 거리의 근접성과 감정의 크기라는 두 종류의 정의를 경험적으로 아는 말이다. 중요한 건 <레미제라블>에서처럼 핸드헬드로 움직이는 카메라의 무빙과 함께 가깝게 크게 들어갔을 때다. 이제 시선이 아니라 동선의 문제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때 저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 감정을 이해할 만큼 가까이 있다는 시각적 공감이 작동하면서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는 동시성과 현장성이라는 인상을 강조하게 된다. 실례로 수많은 액션영화가 핸드헬드를 사용하며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거기 그 인물의 육체의 동선과 관객의 환상적 동선이 함께 한다는 인상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그 주인공의 육체 옆에 관객의 육체도 함께 뒹굴고 있음을 상상하게 하려는 환시다.

장발장이 노래를 할 때, 판틴이 노래를 할 때, 마리우스가 노래를 할 때, 혁명군이 노래를 할 때 거의 예외없이 이 영화는 클로즈업과 핸드헬드를 병행하여 그들을 그려내는데, 그 영화적 방식에 의해 거의 마음속 구호에 가까운 어떤 리얼한 영화적 인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저 인물에게 가까이(클로즈업)! 저 인물과 함께(핸드헬드)! 이에 대한 가장 실천적 예는 사실상 뮤지컬영화의 전통에서 찾기 어렵고 디지털 시대에 도착한 한편의 액션영화를 비교할 때 더 쉽게 납득할 수 있는데, 마이클 만의 <퍼블릭 에너미>가 관객에게 현장에 입회하여 저 인물과 함께 다니는 감정을 느껴볼 것을 제안하며 썼던 영화적 방식과 오히려 매우 유사하다. 저들의 육체와 저들의 시간과 함께, 라는 구호다.

<레미제라블>에서는 그런 방식의 리얼리티강조가 단 한번이거나 몇번이 아니라 영화 내내 지속된다. 그게 이 영화의 흠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이 영화의 욕망이며 비로소 우리가 받았다는 그 위안의 가설의 실마리일 수도 있다. 어느 한 사람을 보는 방식이 그런 것이 아니라 영화 속의 인물들을 하나같이 동시성과 현장성의 느낌으로 보게 될 때 육체의 감각 재현의 차원이 강력해지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발생한 리얼리티가 저 스크린 속의 인물들과 우리 사이에서 반쯤은 착각에 가까운 유사성을 발휘하면서 19세기 파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받아들여도 좋다고 여기게 하는 동시에 뮤지컬 본위의 과장된 귀여움을 모조리 제거하면서 뮤지컬에 리얼리즘을 강조하고야 만다. 물론 여기에 혁명의 내용이 없었다면 저것이 우리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는 생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리얼리티의 감각의 증폭이 없었다면 우리의 리얼리즘의 가능성은 어쩌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착각에 빠진 리얼리즘적 무드가 문득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통각을 자극하는, 그래서 그 통각을 위안이라고 표현해도 괜찮겠다는 가설을 만들어낸다. 비단 혁명의 서사라는 내용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각도의 이미지적 리얼리티의 강도를 감응하는 과정에서 그 리얼리티에 대한 경험들이 쌓여서 그 이야기의 감흥을 본래의 것보다 더 상승시키는 동시에 우리의 리얼리즘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 한편의 뮤지컬영화는 스스로는 무대 뮤지컬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가 되고 싶었으나 우리에게는 실패한 집단적 유토피아를 상기시키는 리얼리즘의 텍스트가 된 것이다.

군중과 유권자 사이, 군중됨의 경험

클로즈업의 이론가 벨라 발라즈는 “가장 절절한 인간의 독백은 무대에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만이 그러한 표현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클로즈업은 캐릭터를 큰 무리 속에서 끌어내어 실제로 그가 얼마나 고독한지, 이 군중 속의 고독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 관한 한 벨라 발라즈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한편의 영화가 클로즈업이라는 영화적 표현을 선택하여 자기도 모르게 무대에서는 하지 못할 것을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완수했다고 하자. 만약이라도 그게 가령 한 사람의 독백과 클로즈업에 그쳤다면 그건 군중 속에 선 한 인물의 고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레미제라블>에서처럼 시종일관 독백을 하고 클로즈업을 할 때 그건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느끼는 고독의 연속이므로 차라리 집단적인 군중의 고독이 아닐까 싶다. 군중 속에서 고독한 게 아니라 군중이 고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클로즈업이 사용된 건 아니었지만 어떤 독백의 영화를 기억한다.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카메라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넘어가며 베를린 시민들의 꼬리를 잇는 독백을 묘사했을 때 그건 베를린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고독이 아니라 베를린의 고독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어느 하나의 개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바로 그들 군중이 주인공이었다.

결국은 보들레르를 말하기 위해서였지만 베냐민은 <레미제라블>의 원작자 빅토르 위고에 관해 말하며 군중에 관한 인상적인 의견을 많이 남겼다. “위고는 자신의 작품에 집단적인 제목-레미제라블, 바다의 노동자들- 을 붙인 최초의 작가였다. 군중은 그에게, 거의 고대적인 의미로, 고객의 무리 즉 독자, 유권자 대중이었다”고 베냐민은 지적했다. 이때 독자와 유권자라는 말이 주는 현실적 뉘앙스의 파괴력을 우린 피해가기 어렵다. 물론 위고는 민중과 혁명적 시민을 다루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도 그러하다. 하지만 위고의 작품을 무대 뮤지컬로 만든 작품을 다시 뮤지컬영화로 만든 영화 <레미제라블>이 우리에게 왔을 때 이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상품에 대한 우리의 위치가 영화적 독자 즉 집단적 관객인 동시에 더도 덜도 아닌 집단적 유권자 대중이었다는 사실이 지금으로서는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이다. 군중은 군중일 뿐 혁명성을 담보한 피지배계층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군중은 계급도 계층도 왼쪽도 오른쪽도 나눠지기 전에 이미 있는 무리들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렇게 나눠지기 위한 조건이며 덩어리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경험이 도취적이고 충격적이었던 19세기의 파리와는 다르게 오늘날 군중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는 무디고 무뎌졌다. 그럼에도 군중을 자극하는 군중심리는 기회와 동기를 따라 언제든 재부여될 것이며 그 어떤 사회적 현상 및 그 어떤 예술작품의 자극으로도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말에 우리는 선거를 통해 그런 경험을 했다. 어제와 같은 양편의 구도로 나뉜 선거에서 군중심리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누구라도 이쪽 아니면 저쪽에 속해 있을 만한 상황에서 그런 집단화의 경험은 어느 개인의 판단이 옳건 그르건(조금 이상한 표현이지만) 군중됨의 경험을 겪게 되었다. 그 군중됨의 경험이 지나자마자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이 온 것이다.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다면 군중심리를 자극하는 군중미학이라는 표현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군중심리를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군중미학도 가능할지 모른다. 때문에 뮤지컬을 영화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감독들은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에 완전무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뮤지컬이 군중미학으로 군중심리를 긍정적으로 자극하여 미학의 정치화를 이루게 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뮤지컬이 결코 구체적인 인간과 사물의 일회적이고 찰나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표현의 불구로 남게 되는 장르라는 건 사실이지만, 반면에 이 장르가 엔터테인먼트, 유토피아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건 여전히 옳아 보인다. (군중 또는 대중의) 엔터테인먼트와 (시민의) 유토피아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뮤지컬이 혹은 뮤지컬영화가 군무나 합창으로 작품을 끝맺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 역시 이미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이, 혁명에 참여한 자들과 그들을 외면한 자들이, 고결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이 한데 모여 도시의 가장 높은 바리케이드에 서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것으로써 위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영화 내내이 영화의 전권을 작동시키는 리얼리티의 총체들과 그로 인한 우리의 리얼리즘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비로소 이 영화의 숨은 실체였다는 걸 말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은 치유를 해준 것이 아니다. 위안을 가져다준 것도 아니다. 지나가버린 군중됨의 경험을 일깨우고 그 집단적 경험의 기억을 불러와서 그 열기를 다시 한번 데우는 데 일조한 것이다. 위고의 군중의 문학성을 가장 고색창연하게 실현한 소설 <레미제라블>이 전적으로 엔터테인먼트가 되기 위해 한편의 무대 뮤지컬로 재탄생되고 수십년이 흘러 영화가 스크린에 훼손 없이 무대 뮤지컬의 감흥을 기입하기 위해 몇 가지 영화적인 선택을 거쳤을 때 그렇게 완성된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은 더도 덜도 아니고 우리가 근래에 겪었던 군중됨의 경험적 감각을 주술처럼 깨어나게 하고야 만 것이다. 거리의 산보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도 나도 그런 산보자 중 하나가 되고 싶다. 하지만 군중의 시대를 겪으며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사실을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대한 생각을 통해 끝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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