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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 루저들의 무심한 활기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를 보며 한국영화가 피해자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함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이하 <앤젤스 셰어>)를 본 뒤 남다은 평론가가 얼마 전 <씨네21> ‘신전영객잔’에 쓴, 최근 독립영화의 경향에 관한 편지 형식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글이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에 감동받아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프린트해 나눠주려다 말았다. 대신 몇몇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그의 글을 언급하며 지적질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앤젤스 셰어>를 보고 다시 남다은의 그 글이 떠오른 것은 관객과의 대화 도중 영화청년으로 보이는 한 패기있는 젊은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는 종래의 켄 로치 영화와는 결이 좀 다른 이 영화가 나름 재미있고 연륜을 증명해준다고 한 내 말을 반박하고 그저 능숙함만 보이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국의 독립장편영화를 본 최근의 경험을 말하면서 남다은의 글을 인용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무식하고 더럽고 게으른 쓰레기들…

<앤젤스 셰어>는 무능하고 게으른 실업자 청년들이 세계 최고의 위스키를 쥐도 새도 모르게 조금 훔치는 이야기다. 주인공 로비와 그의 친구들이 위스키 창고에 잠입해 오크통에서 세 병 분량을 훔쳐낸 뒤 다음날 그 위스키는 사상 최고의 경매가로 미국의 부자에게 팔린다. 로비의 칠칠맞은 친구 알버트는 그중 한병을 부주의로 깨트리기도 하지만 로비는 여하튼 수완을 발휘해 남은 두병 중 한병을 위스키 수집가에게 비싼 값에 팔고 나머지 한병은 자신에게 위스키의 맛과 멋을 알려준 사회교육관 해리에게 몰래 선물한다.

좀 엉성하긴 하지만 <앤젤스 셰어>는 <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강탈영화의 플롯을 갖고 있다. 로비는 처음부터 도둑은 아니다. 그는 폭력전과가 있는 동네 양아치이며 이제 막 애인 레오니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은 참이다. 사회봉사 활동을 나가면서 위스키에 대한 자신의 후각이 뛰어나다는 걸 안 그는 가장으로서 자리잡을 밑천을 벌기 위해 최고급 위스키를 훔칠 계획을 짠다. 이게 영화의 중반부쯤 윤곽이 잡히는 설정인데, 이전에도 이후에도 스토리 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켄 로치와 그의 오랜 협업자인 시나리오작가 폴 래버티는 스토리보다는 캐릭터 묘사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오프닝 시퀀스엔 법정에서 판사의 판결문을 듣고 있는 주인공들의 범죄 행각을 화면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모두 다 너절하고 한심한 범죄자들이다. 이들의 범죄는 앞날의 비전을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하지도 않는 실업자 청년들이 무료한 시간과 가난을 버티는 수단으로서 행한 짓들이고 죄질이 중하지는 않지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중 가장 죄질이 안 좋은 짓을 저지른 이가 로비인데, 술에 취해 금요일 밤 데이트를 나온 남자 대학생을 엉망진창으로 두들겼다. 모범생으로 살아온 상대방에게 심한 트라우마를 안겨주어 그는 폭행을 당한 뒤 몇년간을 폐인처럼 지낸다. 이제 아이 아버지가 된 로비는 그런 피해자와 그의 가족들을 출소 뒤 면담하면서 지독한 자기혐오와 갱생의지를 동시에 갖는다. 그가 위스키 감별에 빠져드는 것은 해리라는 사회교육관에 감화된 덕분이지만 동시에 아이 아버지로서 제대로 살고 싶다는 그의 자발적인 의지도 작동한다. 빈둥거리던 로비의 행동에는 나름 절실함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비루하던 그의 눈빛에 총기가 보이는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여전히 고만고만하다. 알버트와 라이너, 여자지만 사내 못지않게 거친 모는 모두 한심하다. 뚱보 알버트는 특히 재미있는 인간인데 더러운 것에 대한 둔감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주의력이 산만해서 늘 뭔가 사고를 친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호감을 갖기 힘든 이 등장인물들에 대해 켄 로치는 어떤 윤색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식하고 더럽고 게으른 사회의 쓰레기들이다. 그중 유일하게 머리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 로비지만, 그도 원한을 산 동네 건달들에게 쫓기며 줄행랑을 놓을 때 보이는 이미지는 쥐새끼 같은 놈이다. 영화의 말미에 로비와 친구들은 위스키를 훔쳐 자신들이 사는 동네로 돌아오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는데 경찰들은 여자의 치마와 같은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킬트를 입은 알버트에게 치마를 들춰보라고 명령한다. 알버트가 항변하다가 치마를 들춰 보이자 경찰들은 수일간의 행군으로 물집이 잡혀 고름이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알버트의 중요한 부위를 보고 못 볼 것을 봤다며 노골적으로 면박을 준다. 그런데 인상을 쓰는 것은 경찰들뿐만이 아니라 로비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친구 사이지만 알버트의 불결함에 늘 치를 떨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지어다

이게 중요하다. 켄 로치는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실업자 청년들을 묘사하면서도 기성사회가 그들에게 가하는 편견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깥에서 보는 대로 혐오감을 주는 낙오자들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당당하며 솔직하고 자신들의 약점에 대해 어떤 자의식도 없어 보인다. 그들은 우리가 이렇게 무식하고 무능한 것에 대해 뭐 어떻다는 말이냐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생활한다. 자잘한 전과기록을 갖고 있는 그들은 당연히 도덕적 자의식도 없다. 고급 위스키를 훔쳐내는 것에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알지 못했고 모두 다 행복하다. 제목 그대로 이건 천사의 몫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강탈영화의 장르공식을 살짝 비틀어낸 켄 로치의 전략은 캐릭터 묘사의 당당함과 활기를 통해 자연스레 해피엔딩을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우리는 <오션스 일레븐>류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단죄당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똑같은 기대감을 품는 게 영화 관람의 윤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앤젤스 셰어>의 주인공들은 태어날 때부터 루저였고 지금도 루저이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지만 화면 속에 보이는 그들은 불행하다고 평하기에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그들은 루저로서 그냥 사는 것이다. 관객으로서 내가 그들을 보며 느끼는 것은 영화 속 사회교육관 해리가 로비를 비롯한 인물들에게 보여주는 관대한 애정과 비슷하다. 잔소리하지 않고 그들 옆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이쯤해서 남다은의 글 가운데 이 영화와 연관있다고 여겨지는 대목들을 인용해보고 싶다. 그는 그 글의 결론 부분에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언급을 적어놓았다. “저는 결국 영화가 중요한 건 인간을 규정하는 판단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 때문이라는 근본적인 깨달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영화로 분노하는 일보다 영화로 분노의 틈에서 삶의 생기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껴안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도 새삼 느낍니다.” 여기서 나는 ‘규정보다는 이해, 분노보다는 삶의 생기, 삶의 생기를 필사적으로 껴안는’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가닿는다. <앤젤스 셰어>에서 로치는 사회적 환경에 억눌리지 않는 젊은이들의 무심한 활기에 방점을 찍는다. 그들도 근심하겠지만 24시간 내내 근심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논다. 그들의 노는 행위에 범죄행각이 끼어들어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그들은 논다. 백수로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놀 수 있는지 최적화된 생활패턴을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이 리얼리즘에서 가능한 수평적 이해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환경론의 과도한 희생자로서 등장인물을 그리는 적지 않은 한국의 독립영화들은 창작자의 수직적 시점을 통해 등장인물에 공감하는 척하다가 궁극에는 자기 연민에 도달하는 함정을 피해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장르적 관습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앤젤스 셰어>를 플로팅의 기능 면에서만 보면, 허점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적당히 편의적인 설명장치를 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심리적 발달전개는 장르의 관성 안에서 이뤄진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장르관습을 끌어들였으나 적지 않은 구멍을 노출하는 걸 메워주는 것은 역시 등장인물들의 생기다. 이들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쪽 사회의 계급질서가 공고한 탓도 있겠으나 이들의 삶의 비전에는 수직상승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없다. 그것이 그들의 삶에서 필사적으로 재미를 찾으려는 듯이 구는 행동패턴을 낳는다. 앞서 인용한 글에서 남다은은 젊은이들이 만드는 단편영화들이 <파수꾼>이나 <똥파리>나 <무산일기>와 같은 성공한 장편영화를 추종하면서 리얼리티에 대면하는 태도로 장르를 끌어들이고 장르의 규격에 맞춰 현실을 깎아 맞추는 경향을 비판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사건에 인물을 맞추는 효과와 비슷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물의 생기는 사라진다. 남다은은 그 글에서 왕따현상이나 편의점 알바로 연명하는 20대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자기 연민의 중언부언으로 망해가는 결과를 근심하며 이는 결국 ‘구체에서 시작해서 틀을 만들어가는 방향이 아니라, 추상에서 시작해서 구체를 삭제해가는 방향’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판단하지 않고 예단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해보고 싶다. 사회적 분노를 발산하는 도구로 편의적으로 차용 되는 악인의 역할에 관해 <앤젤스 셰어>는 여유로운 입장을 보여준다. 켄 로치의 기왕의 영화에서도 대체로 비판되는 것은 시스템의 악랄함이었지 악인으로서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혁명의 대의가 무산되는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서사화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나 <랜드 앤 프리덤>과 같은 프로파간다 성격이 강한 영화에서도 인간을 선악으로 도식화하진 않는다. <앤젤스 셰어>에서 주인공들과 다른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로비를 사위로 맞아 들이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는 예비 장인은 건달 출신의 지역유지로 보이는데, 로비에게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을 제의하는 그의 거친 언행에서도 비호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사주를 받고 애인의 출산 뒤 병원을 찾아온 로비를 폭행하는 애인의 친척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위스키 동호회에서 고급 위스키의 내력을 설명하며 품위있게 모임을 이끄는 위스키 감별사라든가 로비의 잔꾀에 속아 로비 일행에게 세계 최고의 위스키가 저장된 창고를 견학시켜주는 관리사 직원들의 모습에서도 창작자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 느껴진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위스키를 훔쳐내는 것은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천사가 도와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를 두고, 또 한편의 글을 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쓸데없는 비평적 잔소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켄 로치의 신작을 보며 새삼 드는 생각은 지식인의 자의식은 지식인의 시선으로 성립될 수 있는 영화에만 적용되는 게 마땅하다는 지당한 결론이다. <앤젤스 셰어>에는 지식인 감독이 불우한 실업자 청년을 근심하는 시선의 흔적이 없다. 그 근심이란 게 어쩔 수 없이 지식인의 시선에서 나온 것일진대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여하튼 그들 나름대로 잘살아갈 것이다. 계급적 불평등에 관한 분노와 비판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게 해당 당사자들에 대한 근심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화적으로 무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는 한국영화들이 주류영화든, 독립영화든 경계를 떠나서 대체로 피해자 프레임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내가 <앤젤스 셰어>에서 가장 기겁하면서도 재미있게 본 것은, 로비가 여러 종류의 증류수를 만들어 친구들과 시음할 때 일행 중 한명인 두기라는 이름의 청년이 다른 사람이 맛없다며 침을 뱉어놓은 술병을 집어들고 태연히 꿀꺽꿀꺽 병나발을 부는 장면이었다. 다들 더럽다며 아우성인데 당사자는 의기양양하다. 나는 이런 묘사가 루저들을 흔히 불결하고 가까이 하기 힘들다고 여기는 부르주아적 편견에 맞서는 켄 로치 감독의 당당한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진정성도 아니고 그냥 사람에 대한 이해다. 그 결과, 이 영화의 인물들은 징징대지 않고 내성적이지 않으며 당당하다. 인물을 판단하지 않고 섣불리 예단하지 않으며 그들 곁에서 그려내는 것, 그게 내가 이 영화에서 장르적 관성을 거둬내고 맛본 리얼리즘의 진한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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