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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실패자들 그래서 더 긍정할 수 있는

미국 현대사의 이면과 개인의 내면을 동시에 보는 <마스터>의 대담한 결말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보고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 건 미국 현대사의 이면을 자기만의 독법으로 파고드는 이 내공 깊은 감독이 내리는 결론이 내게는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프레디, 누가 봐도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가능성이 짙은 남자를 감독이 긍정하는 것으로 봤다. 이는 프레디의 마스터였던 랭카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입을 빌려 그를 ‘마스터가 필요없는 남자’로 찬양하는 대사로도 드러나지만 이미지로도 느낄 수 있다. 영화 초반,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해군 갑판병인 프레디가 무료하게 배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이 이어질 때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이것저것 재료를 섞어 술을 만든 프레디가 만취해 배 꼭대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때 저쪽 아래 갑판 위의 다른 병사들이 먹을 것 등을 던지며 야유하는 광경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 시점 아래 프레디는 순교자처럼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구석에 내몰린 남자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의 경우에는, 영화의 플롯에 따르면, 좀 심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있으며, 고모와 근친상간을 했고, 전쟁에 나가 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었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군대에서도 외톨이였다. 앞서 말한 일련의 장면들에서 프레디는 다른 병사들과 분리된 존재로 비치고 실제로 그렇게 따돌림 받을 만한 행동만 한다. 누군가가 바닷가 해변에 모래로 만들어놓은 풍만한 여인의 형상을 병사들이 둘러싸 구경하는 사이에 프레디는 그 형상을 덮쳐 성교하는 시늉을 한다. 다른 병사들은 처음엔 웃지만 곧 다들 썰렁해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바닷물에 발을 적시고 자위를 한다. 또 다른 장면에선 코코넛을 칼로 자르며 자기 손가락을 자를 듯한 충동적 몸짓을 한다. 정서불안이고 제어할 수 없는 인상의 인간이다. 이렇게 그가 행동하는 것은 불우한 가족사와 전쟁 때문인데, 이건 우리가 한참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그에 관한 사실이다.

처음에 우리는 프레디가 주변으로부터 고립되어 충동적으로 자기 파괴적 행동에 탐닉하는 양상들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한다. 이상하게 행동하는 인간을 지켜보는 것은, 특히 그 원인도 모르고 주인공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에게 고역이다. 전쟁이 끝나고 교관과 상담할 때 프레디는 제시되는 그림을 전부 여자의 성기로 해석하는 일관된 반응을 보인다. 성교에 과민하게 집착하는 이 남자가 앓을 마음의 병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이어지는 또 다른 상담에서 그가 가족에 관해 부분적으로 암시적인 말을 할 때다. 그는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하는데 상관이 ‘비전’(vision)이라고 하자 ‘꿈’(dream)이라고 고쳐준다. 그에게 어머니를 축으로 한 가족의 이미지는 꿈이지 비전이 아니다. 그건 현실에서 성취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현실과 분리돼 있는 가상의 꿈이다.

사실 이것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다. 대신, 우리는 희미하게 느낄 뿐인데 전후 백화점에서 사진사로 일하는 프레디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그가 주로 가족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통해 가족이라는 테마는 계속 이어진다. 프레디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는 옷 피팅 모델이 나오는데, 프레디는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는 쉽게 넘어온다. 프레디의 암실에서 프레디가 만든 밀주를 마시며 킬킬대던 그녀는 먼저 자청해서 프레디에게 자신의 똥배를 과시하며 보여주고 브래지어를 걷어 가슴을 보여준다. 그녀의 은밀하게 살짝 튀어나온 배와 가슴의 이미지는 남자의 유혹의 대상이자 대다수 여자가 감당할 운명인 엄마의 특징을 전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함께 있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의 낭패한 모습 옆에 술에 취해 자고 있는 프레디가 보인다. 프레디는 그토록 성에 집착하지만 실제로 여자 앞에선 술에 곯아떨어져 잔다.

마스터가 필요없는 남자

일관되게 정보를 축적하며 제시되지 않는 프레디의 캐릭터는 매 장면 예측 불허의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인해 우리에게 불안감을 준다. 그에 관해서 비교적 많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농장에서 일하다 술 때문에 쫓겨난 프레디가 알코올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승선하게 된 큰 요트에서 ‘코즈’란 종교를 창시한 랭카스터를 만나면서다. 이상하게도 랭카스터는 무일푼 사고뭉치인 프레디를 환대하는데 이는 그가 자신만의 밀주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랭카스터는 프레디에게 자기 종교의 신도들과 가족들을 소개하지만 프레디는 큰 관심이 없고 랭카스터 역시 그런 프레디의 반응을 개의치 않는다. 두 사람이 따로 선실에서 만나 랭카스터의 치료요법을 시행하기 직전 랭카스터는 프레디의 밀주를 받아 마시며 진심으로 그 술을 즐긴다. 술로 통한 분위기에서 랭카스터가 프레디의 과거를 꼼꼼히 캐묻는 심문요법을 할 때 프레디는 군대에서 했던 것과 다른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프레디의 불우한 가족 내력과 그가 도로시라는 열여섯살의 소녀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도망쳐서 방황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도로시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던 프레디가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그가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디가 배를 타러 간 것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도로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지 못했고 대신 어른의 표식인 술을 마셨으며 거기로 도피했다. 프레디가 두 번째로 숨어 들어간 랭카스터의 요트에서 프레디는 다시 한번 어른이 될 가능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랭카스터는 프레디가 의식적으로 회피하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소리내어 말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이 대목 이후부터 더 기이하게 흘러간다. 정한석 기자가 이미 914호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대로 프레디는 마스터 랭카스터에게 갈수록 감화되는 게 아니라 그의 결함을 본다. 랭카스터의 허상은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쉽게 드러나고 심지어 그의 가족도 그의 종교를 진심으로 믿는 것 같지는 않다.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사업으로서 이 종교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는 랭카스터의 아내 페기뿐이다. 남편이 ‘코즈’ 종교의 원리를 설파할 때마다 불안감을 감춘 미소로 남편 곁을 지키는 페기는 랭카스터의 막후 조종자다. 영화의 중반부에 필라델피아의 후원자 집에서 설교 집회를 주도한 남편이 신도들 앞에서 노래와 춤의 여흥을 부추긴 날 저녁 페기는 세면대 앞에 서 있는 남편에게 불륜을 경고하며 자위를 시켜준다. 이 장면은 무시무시한데, 마치 한창 성욕이 왕성한 사춘기 아들에게 당장의 욕구를 풀어주면서 영원히 욕망을 억누르라고 지시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랭카스터가 노래를 부르며 신도들의 흥을 고취시켜준 그날 집회에서 프레디는 여성 신도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환상을 보는데 그 장면에서 유일하게 나체를 보여주지 않는 이는 의자에 앉은 페기뿐이다. 페기 역시 벗고 있지만 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고 임신한 배만 도드라져 보인다. 여기서 여자가 아닌 엄마로 받아들여지는 이는 페기뿐이다. 이는 프레디의 환상 속에서 그렇게 보인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임신하고 있는 모습으로 영화 내내 나오는 페기는 엄마이자 아내의 이미지이며 주변의 남자들을 지배하는 유일한 여자이다. 특히 랭카스터에게 페기는 엄마와 같다. 그는 페기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한다.

영화 중반, 경찰 유치장에 함께 끌려 들어간 랭카스터와 프레디가 창살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에서 설전을 벌이며 으르렁거릴 때 두 남자는 둘 다 제어 불가능한 어린애 같다. 프레디는 직설적으로 랭카스터를 공격하며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강변하는데, 페기가 없는 상황에서 그가 양변기에 아무렇게 오줌을 갈겨대며 말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애 같다. 이때 이미 프레디는 아버지이자 마스터인 랭카스터의 실체를 알아버린 것 같다. 그는 약점 가득한 인간이며 그 자신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약한 결핍투성이 인간이고 페기라는 어머니/아내의 가르침과 훈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으며 감옥에서 돌아온 뒤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집요한 치료 프로세싱을 하는 장면이 박력있게 펼쳐지긴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이는 오히려 랭카스터인 것처럼 보인다. 프레디는 페기에게 프로세싱을 받을 때 푸른 눈이 검은 눈으로 보이게끔 길들여지지만 랭카스터의 프로세싱을 통해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프레디에게 오히려 랭카스터가 감화받았다는 것은 그가 출간하는 두 번째 교리 책의 핵심이 바뀐 데서 알 수 있다. 이전에 랭카스터는 웃음은 동물의 소리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사람이 몸으로 살아가기 위한 비법이 웃음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프로세싱의 핵심도 기억에서 상상으로 바뀐다. 프레디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나 랭카스터가 교리가 허약한 것임을 아는 것 같다. 랭카스터와 함께 떠난 오토바이 여행에서 프레디는 지평선 어느 점을 찍고 돌아오라는 랭카스터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오토바이를 탄 채 사라져버린다. 아버지/마스터를 떠나버린 것이다.

가짜 어른이 되기보다 진실한 어린애로

스승과 제자, 혹은 유사 아버지와 아들 관계였던 랭카스터와 프레디는 또한 친구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죽임으로써 어른이 될 수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이미 심정적으로 자신의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곧 자신처럼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는 모범생 가면을 쓴 나약한 남자였기 때문에, 프레디는 랭카스터를 아버지로서 상징적으로 죽이지 못한다. 그가 랭카스터를 떠나 찾아간 곳은 고향의 도리스 집이었으나 도리스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뒤다. 남편의 성을 따 도리스 데이가 된, 유명 여배우 이름과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그녀의 현재를 확인한 뒤 그가 있는 장소는 객석에 그 혼자만 있는 극장이다. 거기서 그는 또 꿈을 꾸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랭카스터의 전화를 받는다.

마지막 종결부에서 프레디는 런던에 학교를 연 랭카스터를 방문한다. 랭카스터의 교장 집무실에는 페기가 당당하게 함께 자리해 있다. 프레디를 진심으로 반기는 랭카스터와 달리 페기는 첫눈에 그가 변하지 않았음을 알아본다. 마치 남편의, 아들의 나쁜 친구가 방문한 것처럼 그녀는 차가운 거절의 언사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난다. 이 장면에서 랭카스터는 프레디가 남기를 간청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 프레디를 동경하는 듯한 말을 한다. 그는 프레디에게 어떤 마스터도 섬기지 않고 사는 법을 알려달라고 말한다. 대외적으로 마스터인 그는 마스터를 필요로 하지 않는 프레디를 존경한다. 이제 과거의 스승과 제자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동경하는 친구로서 말한다. 그런데 그 친구, 프레디는 팍삭 늙어 있고 구부정한 허리는 더 굽어 있으며 지속적인 불안과 결핍으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보인다.

랭카스터와 프레디는 서로에게 마스터가 될 수 없는 실패자들이다. 동시에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긍정할 수 있는 인간들이다. 영화의 에필로그 장면에서 프레디는 술집에서 만난 풍만한 여성과 다소 풀기 없는 섹스를 하며 이전에 랭카스터가 자신에게 프로세싱 도중에 했던 말들을 흉내낸다. 여자는 프레디의 그 말을 유머로 받아들인다. 이 장면은 슬프다. 코즈의 프로세싱을 모르는 그녀에게 프레디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여자라고 말한다. 여자는 영문도 모르면서 좋아한다. 프레디는 여자에게 이 말을 하면서 랭카스터가 자신에게 했던 그 찬사를 메아리로 음미한다. 그렇지만 슬프다. 이 용감함은 자신이 기댈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거대가치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불안을 벗삼아 자신의 나약함을 실감해야 하는 삶이라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프레디가 해군 병사였던 시절 해변의 모래여인 옆에 누워 있는 모습으로 끝난다. 실제 삶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어머니의 젖가슴을 프레디는 끝까지 갈구한다. 그는 성장을 멈춘 어린애다. 그러나 용감한 어린애다. 자신의 불안과 결핍을 다른 것으로 감출 수 있을 만큼 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조리한 화법은 이걸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물학적으로 늙어 보이는 프레디의 외모, 나이가 드는 것과 성숙을 등치시키는 거짓 통념을 해체하면서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긍정하는 이 대담한 결말이 놀라웠다. 미국 현대사의 이면과 개인의 내면을 동시에 보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두루 장착한 이 영화는 가짜 어른이 되기보다 진실한 어린애로 남아 있는 것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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