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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품었던 생각을 끊어버리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가 보여준 영화적 결기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처음 봤을 때 봉준호만은 앞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로덕션 규모와 프로덕션 시스템의 가위에 눌려 봉준호가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악전고투한 흔적을, 주관적이지만,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는 대단원의 장면에서 윌포드를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는 내가 본 어떤 영화에서보다 압도적 기운이 약했다. 스테이크를 굽는 옆모습으로 에드 해리스/윌포드가 화면에 등장해 커티스와 긴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동작과 말투는 화면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봉준호 영화에선 간단한 설정 화면에서도 늘 화면 내의 조형적 긴장이 탱탱하고 배우들의 기세가 그 긴장을 버텨내는 주요 동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설국열차>를 두 번째 보고 나서 이 작품이 여전히 흥미로운 봉준호의 영화적 진경이지 않을까 유보적인 입장이 되었다. 다소 이완된 형태지만 봉준호의 영화적 결기는 화면 속에서 지탱되고 있었다.

숏과 숏의 느슨한 밀착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가 목적지를 거짓으로 알려주는 버스와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청량리에 간다고 승객을 태워놓고 왕십리에 데려다놓는다. 승객은 불평해야 마땅하지만 가는 도중 본 풍경에, 도착하고 본 풍경에 얼이 빠져 운전기사의 거짓말을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감동하기조차 한다. 이 영화의 내용에 비유하자면 봉준호는 승객에게 거짓 목적지를 알려주고 태우고 가는 기관사다. 계급대립의 우화인 척해놓고 제3의 결론으로 이끈다. 평자들 사이에 호오가 엇갈리는 건 이 운행과정에선 내러티브에서 튀어나온 이미지의 잔상 효과가 강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에서의 송강호를 비롯한 배우들의 얼굴, <괴물>에서의 한강의 전혀 낯선 풍경들, <마더>에서의 김혜자의 스펙터클한 얼굴과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한 마을의 공간적 인상들과 같은 것이 <설국열차>에선 잘 남지 않는다. 그것들은 봉준호 영화에서의 여백, 잉여 또는 얼룩과 같은 것들이고 장르 규범의 규칙을 이탈하면서 로컬리티에 기초한 정서적 배색을 강하게 칠하는 장치들이었다.

왜 <설국열차>에선 뇌리에 강하게 남는, 정서적 배색장치로서의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일까. 아마도 봉준호의 단념의 결단, 등장인물 누구에게도 머물지 않겠다는 단념의 결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씨네21> 918호에 실린 영화평에서 남다은은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대화하는 장면에서의 연결이 이상하다는 걸 지적했다. 그들은 대화하고 있지만 서로 상대방을 향한 시선은 어긋나는 듯이 받아들여지도록 찍혀 있다는 것인데, 그는 이걸 두 세계의 충돌을 인위적으로 기피하는 연출의 궁여지책으로 해석했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인데 이제까지 봉준호는 이런 식의 느슨한 연결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숏과 역숏의 결합이라는 전통적인 편집술을 체계적으로 세공해 대화 장면을 보여주는 감독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도입부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박두만 형사가 논두렁 배수구에서 사체를 발견하고 현장보존을 지휘할 때 동네 꼬마가 옆에서 알짱거리며 박두만의 말을 따라했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박두만이 말하면 꼬마가 따라한다. 박두만은 꼬마를 쳐다본다. 꼬마도 박두만을 쳐다본다. 박두만이 고개를 갸웃하면 꼬마도 고개를 갸웃한다. 장면에 강세를 주는 이 재미있는 연출법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시선의 일치를 통한 체계적인 숏과 역숏 결합 문법의 정통 사례인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소통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 마주치지만 박두만에게 소년의 행동은 수수께끼다. 이 영화에서 박두만의 시선이 건지는 것은, 그럼으로써 관객에게 남는 것은 수수께끼다. 영화 내내 척 보면 범인인지 알 수 있다는 박두만의 직감은 한번도 들어맞지 않는다. 이 영화의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 박두만이 관객을 쳐다볼 때 수수께끼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겨진다.

숏을 촘촘히 연결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인과적 논리를 해체하는 것은 봉준호의 일관된 연출 수사법이었다. <괴물>에서도, <마더>에서도 이런 사례는 많다. 봉준호는 장면 연결법에서도 이런 수사학을 즐겨 사용하는데 앞 장면에서의 누군가의 시선을 보여주고 다음 장면에서 그 시선의 대상을 보여줌으로써 마치 앞 장면의 인물이 뒤 장면의 대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연결이 대표적이다. 이는 관객의 오인을 유도하고 내러티브에 축적되지 않는 여백으로 남겨지며 잉여의 이미지로 저장된다. 이것이 봉준호가 정해진 장르 내러티브 규범에서 따로 주제적 정서를 이중으로 쌓는 방법의 하나였다. <설국열차>는 폐쇄적인 기차공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이런 연결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쉽지 않다. 여기서 숏 연결의 밀도를 추구하면 내러티브 규범에 단단히 부착될 위험이 생기고 내러티브에서 탈선하는 심층의 주제적 통로 개척이 불가능해진다. 대신 봉준호는 컷이 밀착돼 있지 않다는 느낌으로 대화 장면들을 찍는다. 이 영화에선 인물로부터 묘하게 카메라가 거리를 두는 것에서 나아가 붕 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

같이 밥 먹는 인물의 부재

진정한 영화적 소통이라는 건 역설적이지만 숏과 숏이 붙어 있을 때, 논리적 인과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 이뤄지는 게 아니라 뭔가 미진한 게 남아 있을 때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봉준호의 영화가 지금까지 매력적이었던 것은 그의 영화의 화면이 지탱하는 긴장이 논리적 인과에서 살짝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남다은은 커티스와 남궁민수의 대화 장면의 이상한 연결법이 내러티브와 주제의 구멍을 표시하는 것으로 봤지만 이것은 봉준호식 연결법의 상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서둘러 말하기 전에 허문영의 또 다른 흥미로운 해석을 언급하고 싶다. 허문영은 아예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가 보고 듣는 것이 환각의 산물이라는 걸 꼼꼼히 추정한 다음 마지막 장면의 북극곰마저도 영화가 제시하는 거대한 환영으로 해석했다. 커티스의 세계와 남궁민수의 세계가 만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충돌할 기회도 잃어버리며 내러티브와 주제의 밀도도 해체된다는 남다은의 주장보다 더 과격한 추론이다. 허문영은 기존의 봉준호 영화와 다르게 질문의 여지를 관객에게 돌려줄 시선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이 두 등장인물의 환각적 시선을 지적한다. 허문영과 남다은의 해석은 다른 방향에서 이뤄졌지만 두 사람 모두 이 영화에 봉준호 영화 특유의 파열이 일어날 지점이 없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들의 해석에서 받은 감동과는 별개로 이 영화로부터 어떤 동요를 받은 나는 이 모든 것이 봉준호의 단념의 소산, 등장인물에 대한 단념뿐만 아니라 미래 상황을 빗댄 현재에 대한 단념의 흔적이라고 느낀다. 이전의 영화들에서 송강호와 김혜자의 얼굴에 이입시켰던 그 공감의 시선을 봉준호가 깨끗이 단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영화 속 등장인물의 얼굴에는 여하튼 한국적 현실, 어쩔 수 없이 축적되고 묻어난 삶의 흔적이 반영돼 있다. 매정하게 물러서서 관찰할 수 없다. 가족처럼 지긋지긋해도 같이 밥은 먹어야 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괴물>에서 따뜻한 송강호와 노숙자 아이가 밥 한 공기 나누며 끝나는 장면, <마더>에서 공들여 되풀이되는 김혜자와 원빈의 백숙 식사 장면이 지시하는 것은 그들의 모자란 인성이나 불우한 처지를 감안해도 그들은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관계임을 함의한다. <설국열차>는 계급투쟁 활극이라는 탈을 쓴 미래의 우화이자 현실정치의 반영이다. 여기서는 같이 밥을 먹어야할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봉준호는 영화 속 윌포드처럼 이 영화가 기차를 배경으로 이뤄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매혹됐다고 여러 지면에서 밝힌 바 있다.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 지하실이나 <살인의 추억>에서의 축축한 논 옆 배수로나 <괴물>의 어두운 한강 다리 근처 배수로나 <마더>에서 폐가가 많은 마을의 어둑어둑한 골목길이나 모두 봉준호의 폐쇄된 장소에 대한 집착과 매혹을 드러낸다. 이 세상은 잘 정돈되고 평온한 듯이 보이지만 겉으로 보이지 않는 곳을 파고들어가면 세상의 비밀이 숨어 있다. 그곳은 암울한 일들이 곧잘 펼쳐져 있지만 동시에 흥미롭고 적나라하게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간 봉준호는 거의 매번 관객에게 세상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이런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머물며 흥분을 맛보고 싶다는 유혹을 걸어 성공했다. 이 공간들의 축축하고 불길하고 음습하고 어두운 질감을 미래 배경의 기차로 옮기면서, 그는 닫힌 공간에 갇힌 자의 피학적인 즐거움을 보여주는 자로서의 곤란에 처했다. <설국열차>의 기차는 이런 봉준호의 폐소공포증에 대한 매혹을 다양한 구경거리로 전시하고 싶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 윌포드의 욕망에 편승해 세상의 요지경을 응축하고 싶은 그의 욕망의 소산이지만 정치적 우화로 추상화되는 지경에서 곤경에 처한다.

정치적 현실의 포기

여기서 다시 한번 단념의 결기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보자. 미래의 디스토피아 축도로서의 기차를 그리면서 봉준호는 윌포드가 그랬듯이 기차를 장난감처럼 마냥 즐길 수는 없다. 기차 안 약육강식의 질서는 불변이며 근본적으로 그걸 바꿀 수는 없다고 윌포드는 강변하며 꼬리칸의 현자 길리엄도 동조한다. 완벽한 기시감이 드는 이런 현실적 설정을 강조하는 이는 틸다 스윈튼이 탁월하게 연기한 메이슨 총리다. 그는 열차 앞칸을 넘보는 꼬리칸의 하층민들에게 질서와 균형을 강조하면서 각 계급은 각 계급의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고 강변했었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벗어났을 때 세상에는 혼란이 일어난다고 지배자들은 말하고 다수는 또 동조한다. 이걸 경쟁의 원칙으로 다스리는 게 자본주의 질서이며 그걸 극단으로 강화해 승자독식의 사회로 만든 것이 신자유주의다. 꼬리칸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인육을 먹기 시작할 때 자신의 팔을 잘라 먹을 것을 대신하게 한 현자 길리엄의 행동은 위대한 것이지만 이 시스템의 질서에 근본적인 처방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명분으로 내건 자들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지만 실은 공존공생하는 관계에 대한 우회적인 암시가 <설국열차>의 절정부에 어른거리면서 늘 선과 악의 코스프레가 눈에 들어오는 우리의 정치적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이게 상투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이 영화는 단념의 결기를 띤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감정적으로 이입할 만한 여지가 있는 인물은 송강호가 연기하는 남궁민수다. 도무지 리더가 될 수 없는 인물로 보이는 이 캐릭터가 갖춘 인간적인 매력, 계급적 대립에 심드렁하고 지배세력이 바뀔 뿐 동일한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현실에서 탈출을 꿈꾸는 그의 비전은 과감하기보다는 단념에 가깝다. 그는 맨 정신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환각으로 살아간다. 그가 경쾌하게 보이는 것은 환각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커티스는 도입부에서 머리칸으로 끌려갔던 두 소년의 모습을 본다. 기차 부품을 대신해 기계처럼 동작하는 그들은 환각에 취해 있다. 남궁민수 모녀와 더불어 그나마 미약하게나마 공감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바로 이 소년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명확한 논리적 어휘가 없다. 남궁민수의 말은 환각자의 중언부언일 수도 있고 소년들은 아예 말이 없다. 그들의 모습과 이미지에서 어떤 징후도 읽어내기 힘든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모습에서 감독 봉준호의 예술적 자아가 어른거린다. 기차라는 장난감 안에서 놀고 싶었던 그는 환각에 취해 일하고 있는 소년들과 환각에 취해 탈출하려는 어른의 모습을 통해 현재의 정치적 현실을 단념하는 결론에 이른다. 이걸 퇴행이라고 비판하고 싶지 않다. 거꾸로 우리가 깨끗이 이 현실을 단념함으로써 진정한 소통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루한 100분 토론처럼 도돌이표를 찍고 선악 코스프레를 하는 세상에 대한 포기, 더이상 기성 어휘로 토론하지 않고 말을 더듬더라도 새로운 어휘와 상상력을 찾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으로서 나는 이 영화에서 봉준호의 단념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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