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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피할 수 없다면 껴안아라

<애프터 루시아>가 그리는 고통의 윤리학

얼마 전 미셸 프랑코의 멕시코영화 <애프터 루시아>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해설을 했다. 한달에 한번 늘 해설을 했던 극장인데도 평소에 비해 관객이 크게 줄었다. 지난해 칸에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감독이 만든 멕시코영화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해도 수입사나 홍보사도 그다지 성의가 없는 기색이었다. ‘애프터 루시아’란 제목을 지은 이유가 궁금해 홍보사의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최근 이 나라에 살며 인터넷에 뜨는 뉴스에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통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가해자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우리는 가해자 편에 서는 방식을 택한다. <애프터 루시아>는 그 점에 관해 관객에게 대속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치유는 쉽지 않다

<애프터 루시아>는 교통사고로 아내와 엄마를 잃은 부녀의 이야기다. 감독은 그걸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아서 영화가 한참 지난 뒤에야 알 수 있다. 영화 첫 장면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주인공 로베르토가 정비소 수리공에게 차의 정비내역을 듣고 고친 차에 올라탄 다음 시동을 걸고 거리로 차를 몰고 가는 과정을 5분여 가까이 차 뒷좌석에서 한 테이크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로베르토가 차 열쇠를 운전석 앞에 팽개치고 차를 버리고 떠나는 데서 끝난다. 관객을 구경꾼 시점에 가둬놓고 영문 모를 상황에 내버려두는 이 장면은 심한 스트레스에 빠져 있는 로베트로의 마음을 슬쩍 짐작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걸 나중에 복기하더라도 난폭하게 다가온다. 주인공의 고통에 다짜고짜 동참할 것을 강요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저 어리둥절한 기분만 느낀다. 나중에 그가 아내의 죽음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요컨대 이 영화는 관객이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전제해놓고 관객에게 그의 고통의 일부를 경험할 것을 지속시간이 긴 화면으로 강요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는 건 고통스럽다. 처음 봤을 때는 그 고통이 너무 심해 몇번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왜 그랬을까. 로베르토와 그의 딸 알레한드로의 고통은 측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의 무력감을 강조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없지만 이 영화에는 특이한 지점이 있다. 영화에서 로베르토와 알레한드로가 겪는 고통과 상처는 치유되거나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증폭되고 폭발한다. 첫 번째는 아내와 엄마의 죽음 때문이다. 로베르토와 알레한드로는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그들의 아내와 엄마를 잃었다. 사고의 자세한 내막은 밝혀지지 않지만 그들 부녀가 함께 실수했을 것이라는 암시가 있다. 영화 중반, 보험회사 직원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화면에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는 직원은 냉정한 목소리로 로베르토가 알레한드로에게 운전을 가르쳐주다가 사고를 낸 게 아니냐고 추궁한다. 로베르토는 부정하지만 그가 알레한드로에게 운전방법을 얘기해준 건 맞다고 말한다. 사고 당시 그의 운전은 부주의하고 산만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일어났을 사고로 그의 아내이자 알레한드로의 엄마는 죽었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들 부녀의 죄책감은 겉으로 발설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첫 장면 뒤에 화면은 바닷가에서 먼 곳을 쳐다보는 알레한드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앞을 응시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뒤쪽에서 그녀의 옆모습만 슬쩍 보여줄 뿐이다. 로베르토와 마찬가지로 알레한드로의 마음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고향을 떠나 멕시코시티로 가서 새 삶을 꾸리려는 부녀의 여행을 보여주는 차 이동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별말 없이 앞만 응시하는 그들을 보여줄 뿐이다. 딸이 이전에 쓰던 차를 어쨌느냐고 묻자 아빠는 팔았다고 짧게 답한다. 뒷좌석에 있던 딸은 팔로 아빠의 어깨를 가볍게 만져준다. 이들의 감정 표현은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영화가 전개될수록 상처를 대하는 아빠와 딸의 태도가 다르다는 게 차츰 드러난다. 아빠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외면하려 하고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산다. 요리사로 취직한 식당에서 조수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거칠게 구박하고 심지어 재료 다듬는 중에 조수들이 결혼식과 관련된 사적인 얘기를 나누자 참지 못하고 식당을 그만둔다. 딸 알레한드로는 아빠와 다르다. 멕시코시티에 이사한 새집을 마음에 들어 하며 그녀는 이 집의 실내장식을 고향 집과 비슷하게 해도 좋지 않겠느냐고 아빠에게 제안한다. 아빠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딸은 엄마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껴안고 있다. 나이에 비해 깊은 눈빛을 지닌 신인배우 테사 라가 연기하는 소녀의 처신은 인상 깊다. 아빠가 그만둔 식당에 찾아가서 아빠의 조수에게 요리 만드는 법을 시연해 도와줄 만큼 그녀는 아빠가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자신도 새로 전학한 학교에 적응하려고 애쓴다. 아빠가 엄마와 함께 타던 차를 팔지 않고 버렸다는 걸 고향의 친척 아줌마에게 전해 듣고 아빠 식당에 찾아가서 화를 내는 영화 속 중반 에피소드에서 알레한드로는 집 앞 거실 턱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는데 그때 그녀의 뇌리에 스치는 이미지는 교통사고 당시의 영상이다. 너덜너덜해진 차의 잔해를 치우는 이미지가 이 가녀린 소녀의 머리에 입력된 채로 맴돌고 있다면 끔찍한 일이지만 소녀는 그 고통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는 회피하지 않는다. 소녀는 아빠와 함께 고통과 슬픔을 나누고 싶은데 반해 아빠는 자기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딸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가 없다. ‘애프터 루시아’란 제목은 바로 이렇게 엄마 루시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의 부녀의 삶, 빛을 잃어버린 삶을 뜻하고 있다.

고통에 짓눌린 부녀의 어긋남

더 가슴 아픈 것은, 이제부터 더 중요한 얘기인데, 슬픔을 견디고 나눌 자격이 있는 이 소녀 알레한드로에게 더 큰 시련이 닥친다는 것이다. 소녀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잘 지내려고 하며 그중 가장 부유한 호세라는 남자친구의 아버지 별장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호세와 섹스를 한다. 알레한드로가 호세와 섹스를 하기까지의 마음은 잘 알 수가 없다. 알레한드로는 욕조 풀에 빙 둘러앉아서 마리화나를 피우는 다른 친구들이 함께 피우자고 제안을 해도 끝까지 거부한다. 이미 몇달 전에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는 그녀는 학교에서 행한 약물 검사에서 양성반응을 받아 학부모 상담을 위해 불려온 아빠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마리화나를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면이 바뀌면 알레한드로는 화장실에서 흐느끼고 있고 다음 화면에서 풀에서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며 노는 아이들 틈에 있다. 그다음엔 술에 취한 채 화장실에서 호세와 섹스를 한다. 이때 호세는 휴대폰 카메라 단추를 누르고 애무를 계속하는데 거울에 비친 알레한드로의 모습은 드물게 밝고 활기차다. 앞 장면에서 친구들과 즐기는 척하다 내부의 괴로움을 못 이겨 흐느끼던 소녀가 이 장면에서 적극적으로 섹스를 하는 건 아마도 호세에게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 새 관계의 인연에 대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앞자리에 있던 알레한드로는 뒷좌석에서 카밀라라는 여자친구와 낄낄거리는 호세에게 잠깐 내려서 화장실에 가면 안되겠느냐고 묻는다. 알레한드로는 다정하게, 애인이나 아빠에게 하듯이 묻지만 카밀라가 냉정하게 자른다. 호세는 모른 척한다.

카밀라는 호세의 여자친구 행세를 한다. 호세는 그걸 제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애매하게 처신한다. 알레한드로가 새 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 카밀라의 자리에 앉았다가 살짝 무안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카밀라는 알레한드로에게 여긴 내 자리이니 다른 데로 가라며 부드럽게 말하고 호세와 수다를 떤다. 이 장면의 복선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호세와 알레한드로의 섹스 동영상을 전교생에게 전송했고 이전에 알레한드로와 함께 놀았던 마누엘과 하비에르라는 사내애들이 특히 심하게 알레한드로를 괴롭힌다. 그녀를 왕따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그녀에게 사적 린치를 하는 방법이 잔인하고 집단적이어서 알레한드로는 순식간에 무기력해진다. 누가 과연 섹스 동영상을 보냈을까. 영화에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추정하자면 그 당사자는 호세였을 것이다. 이 교활한 꼬마 플레이보이는 부잣집 사내아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알레한드로를 정복했다는 것을 전교생에게 과시했고 자신은 우월한 플레이보이의 지위를 계속 유지했으며 알레한드로가 전교생에게 이지메 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할 뿐만 아니라 알레한드로에게는 계속 친절한 신사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더욱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질투에 눈 먼 카밀라는 알레한드로를 괴롭히는 린치 작업을 지휘한다.

로베르토와 알레한드로 부녀가 아내와 엄마를 잃은 것은 비극적인 운명의 결과라고 해야겠지만 알레한드로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것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애프터 루시아>는 고통의 견딤이라는 주제를 이중으로 형상화한다. 그들 부녀의 가족에게 닥친 죽음이라는 불행 뒤에 딸에게 그에 못지않은 고통스런 사건이 터진다. 앞서 말한 대로 아빠는 자신의 고통에 짓눌려 딸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딸 알레한드로가 희미하게 발신하는 구조의 제스처를 아빠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들 부녀에게 이 어긋남은 당연한 수순이다. 로베르토는 아내의 죽음 이후 줄곧 그랬고 알레한드로는 그런 아빠에게 슬픔을 함께 나누자고 가냘프나마 끈질기게 소통의 신호를 보냈지만 반응을 얻지 못했다.

고통을 응시하는 행위가 전하는 위로

이들 부녀에게 닥친 고통을 배가하는 것은 고통의 구경꾼들이다. 화면 속의 아이들, 알레한드로의 학교 동급생들은 악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 계획한 희생자를 만드는 음모에 적극적인 행위자로 가담했다. 개인적인 동기는 다 다를 것이다. 관객으로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알레한드로가 매력적인 소녀였기 때문에 각자 다른 동기로 그녀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 별장 파티 장면에서 알레한드로는 이레네라는 소녀와 희롱을 하는 마누엘을 보며 카밀라에게 두 사람이 사귀느냐고 묻는다. 카밀라는 마누엘에게 관심 있느냐고 묻지만 알레한드로는 차라리 수녀가 되겠다고 농담한다. 뚱뚱한 체구로 친구들 사이에 놀림을 받는 하비에르는 여자아이들에게 남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마누엘과 하비에르는 화장실에서 알레한드로에게 추행을 시도하는 대담한 린치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그녀에 대한 그들의 결핍감을 공격적인 위선으로 감추려고 한다. 카멜라는 더 직접적으로 호세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서 알레한드로를 괴롭힌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고통을 알려고 하지 않거나 헤아리지 않는 태도가 체화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무섭다. <애프터 루시아>의 아버지 로베르토는 뒤늦게 딸이 자신보다 더한 고통을 겪었다는 걸 안다. 그리고 상황을 되돌리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레한드로는 아빠 로베르토가 잘못 알았던 것처럼 죽지 않았고 몰래 고향 집에 돌아가서 여전히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응시하고 있다. 영화 말미에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 아빠의 극단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사이 화면으로 알레한드로의 화면들이 끼어든다. 나는 남의 고통을 쉽게 구경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제멋대로 단죄하는 것에 익숙한 이 무서운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남의 고통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준엄한 일인지를 미학화한 <애프터 루시아>의 카메라가 소름 끼쳤지만 영화 말미에 나오는 일련의 연속적인 이미지들, 알레한드로가 가만히 자기 몸속의 고통을 느끼고 들여다보는 장면들에 감동받았다. 영화에서처럼 남의 고통을 함부로 무시하고 즐기는 우리의 참회는 늘 너무 늦게 이뤄질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언어의 형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자기 몸에 담고 응시하는 알레한드로를 보며 비겁한 자의 위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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