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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카메라여, 당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3D <그래비티> 속 ‘볼 수 없는’ 지평의 어떤 순간

<아바타>를 3D로 처음 보았을 때, 대체 무엇을 새롭다고 느껴야 할지 난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감을 이야기했지만, 그 실감의 정체도 모호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동일시 혹은 나비족의 판타지적 세계에 대한 동화를 의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3D 안경이 주는 멀미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튀어나오거나 창공을 가로지르는 이미지들이 나의 육체를 건드렸던 기억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이 영화의 서사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영화가 나의 육체를 통과하는 경험과 나의 육체가 영화 속 세계에 말초적으로 동화되는 경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3D영화의 목적 아니, 효능은 결국 관객이 영화 속 세계 ‘안’에 있다는 완벽한 환영을 주는 데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궁극의 영화적 경험일까. 영화를 본다는 행위와 그 안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욕망은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보았을 때, <아바타>를 보며 3D영화에 내렸던 단정을 수정해야 했다. 물론 <라이프 오브 파이>의 서사적인 우월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를 이야기 구조 혹은 진위로 설명하는 것은 영화의 감흥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바다와 하늘과 세찬 빗줄기와 거대한 숲이 3D로 펼쳐질 때, 나는 이전까지는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이하고 신비로운 경험에 숨이 막혔다. 말로는 표현이 어렵지만, 분명한 건 그 감흥이 단순한 실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미지들이 돌출된다는 인상보다 중요했던 건 거대한 이미지의 덩어리가 수만개의 층위로 갈라져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세계에 잠재되어 있던 어떤 결들이 영화적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요컨대, 현실에서 식탁 위에 놓인 사과 몇 개는 그저 먹는 열매다. 그 사과가 2D영화의 프레임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더이상 먹는 열매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살아서 우리를 감흥하게 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때, 그 감흥의 근원은 생경함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는 말하자면 그 사과의 생경함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층위의 생경함을 더 구축한다. 이 영화의 3D는 관객이 영화 속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판타지를 구축하는 데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세계의 무한한 확장. 나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래비티>를 보았다. 어느 여인의 고독하고 치열한 우주 탈출기로 읽을 때, 이 영화는 지루해진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개인사가 제시되고,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그녀의 사투가 본격화되기 이전이 영화적으로 더 흥미롭다. 그러니 이 글은 이 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흥미로움을 안겨준 다른 무엇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3D가 세계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면, <그래비티>의 3D를 통해서 나는 시선의 자유, 시야의 확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영화 속 인물의 행위가 아니라, 카메라의 움직임과 더 관련이 있으며, 조금은 농담을 섞어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우주를 떠도는) 카메라여, 당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지난주 <씨네21>(929호)에 실린 <그래비티>에 대한 평론가 허문영의 비평을 읽었다(‘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이 영화의 “서사적 기획”과 “시각적 기획”의 어긋남을 예리하게 분석한 그의 비평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이 영화를 “은밀한 에로스”로 읽은 것이다. 비록 주관적인 반응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특정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그 가설은 도발적이고 기발하다. 나 또한 그 장면의 카메라 움직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그 장면을 말하지 않고 3D영화로서 <그래비티>의 흥미로움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그의 비평에 대한 보론 정도로 읽히면 좋겠다.

우주허블망원경을 고치던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과 일행은 갑작스러운 위성 파편들의 공격을 받는다. 파편에 부딪혀 탐사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라이언은 360도를 돌며 저 멀리로 추락한다. 동료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의 통신도 두절된다. 우리는 빙글빙글 돌며 어딘가로 향하는 그녀의 몸을 보고 헬멧 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신음을 듣는다. 카메라는 그녀와 함께 유영하며 그녀의 움직임을 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카메라가 그녀의 헬멧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그녀의 시선이 되어 방금 자신이 있던 자리를 쳐다본다. 카메라가 다시 헬멧 밖으로 빠져나와 그녀를 볼 때, 그녀는 이전보다 더 먼 곳으로 빨려들어가고 있고, 그녀의 신음은 다시 헬멧 안에 갇혀 더 작게 들린다. 간단히 말해 여기서 시점은 컷 없이 헬멧 밖에서 안을 거쳐 밖으로,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점에서 주인공의 시점을 거쳐 다시 카메라의 시점으로 이동한다. 허문영은 이 신기한 움직임에 대해 “관통”이라는 표현을 쓰며 카메라의 외설성과 연결짓는다. 나는 좀 다른 견해를 말하고 싶다.

일단 지극히 사적인 인상에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컷 없이 시점이 이동하는 이 장면이 내게 강렬하게 남은 이유가 어렴풋하게나마 꿈과 관련된 어떤 욕망을 건드렸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 장면의 인상이 몽환적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소 과잉된 해석이라고 생각하지만, 직감에 기대자면, 나의 꿈을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처럼, 불가능한 순간에 닿으려는 욕망이 여기 스며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 동안, 혹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꿈을 꾸는 나(꿈 밖의 나)와 꿈속에서 움직이는 나(꿈 안의 나), 이렇게 두개의 ‘나’가 서로 다른 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불현듯 의식할 때가 있다. 요컨대, 악몽을 꾸는 중에 ‘이건 혹시 꿈이 아닐까’ 하고 바라다가 정말 꿈에서 깨어 안도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혹은 꿈에서 깨어 방금 전까지 또렷했던 꿈속의 세계를 복기해내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실패한 경험 또한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꿈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두 개의 ‘나’ 사이의 경계가 현실의 우리를 안도하게 하지만, 실은 그 경계를 단절 없이 넘나들고 싶다는 위태로운 욕망 또한 우리에게는 있다. 개인적으로 위의 장면은 이 월경의 욕망을 불가해한 시점의 전환을 통해 영화적으로 실현시켜주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꿈이 아니라 결국은 월경의 욕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나의 계에서 같지만 다른 두개의 ‘나’가 서로를 마주하고, 안과 밖이 서로 접합하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하고 두려우며 매혹적인 공기가 이 장면에서 흐른다.

이 주관적인 느낌을 조금이나마 영화적인 언어로 바꿔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카메라의 시점에서 인물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이 장면을 보며 우리는 두 가지 경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라이언의 입장에서라면, 그것은 나를 바라보던 저 카메라의, 미지의, 나아가 우주의 눈이 내 눈이 되는 경험이다. 카메라의 입장에서라면, 내가 쳐다보고 지배하던 저 미물의 눈이 어느 순간 내 눈이 되어버리는 경험이다. 바라보이던 내가 그 시선을 끌어당겨서 바라봄을 획득하는 순간, 혹은 나의 시선이 바라보던 대상에게 빨아들여져서 내가 바라보이게 되는 순간. 말하자면 타자의 눈과 내 눈이 일치하는 순간, 좀 부풀려, 내가 우주가 되는 순간이 여기 있다. 하나의 숏에서 어떤 충돌도, 균열도, 단절도 없이 타자와 나의 시선이 이처럼 유려하게 이어지며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을 목도한 적이 있었던가. <그래비티>의 3D는 그걸 해낸다. 무중력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이 완벽한 환영은 황홀하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카메라는 다시 인물의 헬멧을 망설임 없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저 깊은 심연으로 무력하게 빨려들어가는 인물을 본다. 내동댕이쳐지는 여인의 몸과 비명은 마치 시선의 향유에 대한 처벌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황홀함의 감흥은 훼손되지 않는다. 더이상 나와 너의 구분이 무력하고 오직 시선의 우아한 자리바꿈의 운동만으로 지탱되는 우주의 신비가 여기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카메라의 움직임일 것이다. 마치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듯 카메라가 인물들과 함께 움직이는 도입부 시퀀스의 롱테이크가 대표적이다. 인물들이, 혹은 그 인물들 곁을 유영하는 카메라가 스크린 앞으로 다가와 밀접하게 닿으려는 순간마다 방향을 틀어 저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길 반복할 때, 그 움직임의 선들이 우주의 깊이를 체현한다. 스크린 앞에 닿는 순간 뒤로 튕겨져 사방을 휘젓는 그 투명한 곡선의 행로가 이 영화를, 아니, 이 우주를 무한대로 확장되는 구체(具體)와 구체(球體)로 만들어준다. 지속적으로 인물들을 공격하는 우주의 파편들이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선으로 돌진하며 스크린 앞으로 돌출되려는 이미지들로부터 접촉의 감흥을 그다지 받지 못했다. 그보다는 연결된 무언가가 분리되는 순간, 분리되어 스크린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에 마음이 동했다. 요컨대 망원경을 수리하던 라이언이 지지대로부터 떨어져나와 어둠 속으로 하염없이 추락할 때, 맷이 라이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연결선을 끊고 저 멀리로 사라져갈 때, 그토록 자유롭게 유영하던 카메라는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이들의 형상을 쳐다본다. 혹은 가까스로 도킹 해제에 성공한 기체가 연료 부족으로 움직이지 않자, 라이언은 좌절과 분노를 참지 못하는데, 그 순간 카메라가 창밖으로 쭉 빠져나와 우주에 무력하게 떠 있는 기체와 그 안의 라이언을 가만히 지켜본다.

곡선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와 일순간 물끄러미 멈춰서 쳐다보는 카메라는 <그래비티>가 우주라는 심연에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그래비티>에서 우주는 뒤로만 열려 있는 세계다. 끊임없이 더 안으로, 더 뒤로 파고들어가며 우리에게 우주의 경이로운 깊이를 느끼게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우주의 심연에 얼마나 더 닿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이 영화의 호기심이며 3D의 성취다(이 영화가 2D 카메라로 찍고 3D로 컨버팅한 사실을 들어 이 영화의 3D 효과가 미약하다고 보는 견해들을 종종 접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2D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멀어지는 대상을 그저 쳐다보며 일순간이나마 침묵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그 광활한 심연에 결코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체념이며 3D로도 닿을 수 없는 좌절이다. 이 때 3D는 카메라가 아니라 저 멀리 희미해지는 대상들을 위한 것이다. 그 양극단의 반응 사이에서, 스크린 앞이 아닌 안을 건드리는 카메라와 안으로 사라져가는 대상들을 통해 우리는 이 우주를 경험한다. 무언가 내 피부에 접촉한다는 실감보다 무언가 내게 잡히지 않는다는 비실감이, 무언가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는 환영보다 무언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간다는 환영이 우리를 감흥하게 한다. 허문영은 3D영화로서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매혹이 “내 시선으로부터 빠져나가려” 하며 “나로부터 멀어지는 후방 확장 이미지”에 기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892호). <그래비티>를 보며 나는 그의 지적에 동감한다. 라이언은 이 영화의 카메라가 그토록 간절하게 감응하는 우주의 심연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개인사를 붙들고 사투하는, 달리 말해 스크린 앞에 붙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그러니 그녀의 사적인 서사가 이 영화에서 가장 덜 흥미로운 요소이며 종종 이 영화의 활기를 억압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앞으로 투사되는 이미지들 중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연료가 떨어진 기체에서 죽음을 예감하는 라이언이 두려움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때, 그녀의 눈물방울이 얼굴에서 떨어져나와 스크린 앞으로 다가온다. 어느새 눈물방울은 유리구슬처럼 커지고 거기에 라이언의 얼굴이 작게 비친다. 명확하게 투명한 눈물방울 뒤로 보이는 라이언의 모습은 포커스 아웃된 상태다. 이 장면의 울림은 사투를 벌이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여인의 슬픈 운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실은 눈물 그 자체에서 오는 것 같다. 한갓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슬픔의 현현인 눈물.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뒤로 물러나게 하는 한없이 고독하고 두려운 어둠의 우주 속에서 스크린에 닿으려 애쓰는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물질로서의 감정. 스크린으로 돌진하는 공격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스크린에 매달려 소멸되지 않으려는 이미지. <그래비티>는 한 인간의 지독한 생의 의지를 뼈대로 진행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인간의 존재감이 흐려지고 사소해질 때 아름다워진다.

내게 <그래비티>는 3D영화에서도 여전히 오감의 만족이 아닌, 본다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우주라는 무중력의 공간과 CG와 3D가 만난 이 영화에서 나는 롤러코스터의 짜릿한 긴장감이 아니라, 종종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카메라가 인물에게 귀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생명이 되어 우주를 부유할 때, 상상선, 프레임 등을 비롯한 영화의 오랜 한계선이 부서지고 열리는 것 같은 느낌. 경계를 가로지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그간 존재할 수 없었던 자리를 점유하고 이동하며 무언가를 더 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착각이라 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 해방감으로도 결코 닿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지평의 어떤 순간 또한 느꼈다. 그 희열과 무기력, 그 성취와 좌절의 간극에 <그래비티>라는 우주가 숨쉬고 있다. 이 영화의 어떤 순간에서 내가 느낀 것처럼, 시야가 확장된다는 건 결국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큼 볼 수 없는 것도 늘어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때, 3D영화는 볼 수 있는 지평뿐만 아니라 볼 수 없는 지평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대면하고 감각할 수 있을까.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그래비티>는 적어도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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