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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영웅의 일대기에서 멈춰다오

<변호인>의 에필로그가 뼈저리게 아픈 이유는

<변호인>의 에필로그 장면은 특이한 여운을 남긴다. 시위를 주동하다 구속된 주인공 송우석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들이 일일이 법정에서 호명된다. 당시 부산 지역 변호사들 가운데 절반 이상 숫자의 변호사들이 변호를 맡았다는 자막이 뜬다. 이 장면은 이상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에 기초했으나 굳이 그걸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전개되는 이 영화는 이 에필로그에 이르러 다시 한번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실화임을 확인시킨다. 그때까지 송강호의 송우석이었던 주인공에게서 노무현의 그림자가 강하게 얹히는 순간이다.

자연인 노무현을 존경했으나 대통령 노무현의 시대를 늘 불편한 심정으로 지냈던 나는 ‘국가는 곧 국민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영화 속 송우석의 사자후를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한 노 대통령의 말과 병렬시키기 힘들었다. 그것이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의 한계이자 한국 사회의 한계임을 인정해도 속이 쓰리는 건 마찬가지다.

권력을 쥐었으나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그의 시대를 통과하고 나서 우리는 그의 후임자들이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의 위력을 너무 심하게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물론 누군가의 삶의 맥락은 위치와 입장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변호인>은 그걸 설명할 의무가 없는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지막 장면은 강제적인 정치적 효과를 부르는 장면으로 보였다. 연대의 아름다움으로 현실의 패배를 영웅적으로 수식하는 이 장면의 선동적 여운을 고려하더라도 이 장면은 주인공을 노무현의 고유명사로 수렴시킨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변호인>은 세금 전문 변호사로 출세한 송우석이 단골 국밥집 주인 아주머니의 대학생 아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금 구속되면서 의식의 개화를 일으켜 인권 변호사로 재탄생하는 이야기다. 속물에서 이상주의자로 한 인간이 진화하는 이야기지만 전반부와 후반부가 능란하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인이 아기를 낳을 때 병원비도 없었던 가난한 막노동꾼이자 고시준비생인 송우석이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돈을 버는 속물 변호사로 상승가도를 달리는 전반부는 극의 분위기가 활기차고 무리가 없다.

젊은 시절 가난한 고시생 송우석은 국밥을 먹고 돈을 내지 않은 채 도망치다가 방에서 배를 깔고 공부하던 그 집 아들과 눈이 마주친다. 그는 도망쳐 달려나와 바닷가에서 구토한다. 수치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나중에 성공한 뒤 가족과 함께 국밥집을 찾아가 돈을 갚으려 하자 국밥집 아주머니는 빚은 돈이 아니라 얼굴과 발로 갚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화면에 표현되지 않지만 송우석이 느낀 감정은 자신의 빚을 돈으로 일단 갚으려든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 송우석은 돈만 아는 인물이다. 정치현실에 굳이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던 그는 명문대를 나오지 않은 상고 출신 변호사로 자수성가한 뒤, 그런 인물이 대개 갖고 있는 승리자의 자만으로 거들먹거린다. 그랬던 그가 돈으로만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아는 건 국밥집 아줌마의 태도 때문이다.

고교 동창생들과 국밥집에서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 대학생들의 정치참여 활동을 두고 신문사 기자 친구와 갑론을박하던 송우석이 이제 대학생이 된 국밥집 아들에게 훈계하다가 국밥집 아줌마에게 듣는 욕은 다시 새삼스럽게 젊은 시절 가난한 송우석이 느꼈던 수치심과 비슷한 걸 안겨준다. 그는 자신의 인간 됨됨이에 대해 자그마한 회의를 품는다.

그렇더라도 송우석이 국밥집 아들이 구속 감금된 뒤 아들을 찾는 국밥집 아줌마의 모성에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적극적으로 변호를 자임하는 과정에서 정의와 상식이 무엇인지를 문제시하는 이상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은 급작스럽다. 이는 노무현의 실화에 기초했다는 배경지식이 없으면 성립되기 힘든 플롯의 비약이다. 많은 것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비약한다. 그는 혈기로 인생궤적을 바꿀 수 있는 대학생이 아니다. 가난으로 인한 상흔을 마음속에 모질게 새긴 인물이며 그 때문에 동료 변호사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동산 등기, 세금 전문사로 돈을 벌었던 속물 변호사였다. 자신이 막노동할 때 지은 아파트 호수를 기억했다가 기어코 자기 집으로 만들고야 마는 그의 의지의 동력은 아마도 가족이었을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병원비도 모자라서 공사판에서 가불을 해야 할 만큼 절망적이었던 그의 가난은 가족의 물질적 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면서 해소되었다. 그가 이상주의적 변호사로 거듭나게 한 매개는 국밥집 아줌마의 인정과 모성이지만 그것만이 절대적인 정서적 계기로 추인되기는 힘들다. 송우석 그에게도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이 영화는 전반부에 송우석의 출세 야심의 뿌리였던 가족애를 비교적 상세하게 화면에 끌어들였다가 국밥집 아줌마의 모성으로 그걸 등치시킨다. 가장으로서 송우석이 그렇게 빨리 속물의 허물을 벗는 과정은 이 영화가 실화라는 전제를 빼버리면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송우석을 연기하는 송강호다. 그는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우리가 2000년대 이후에 숱하게 봐온 허허실실 그 송강호의 연기를 보여준다. 그가 연기하는 송우석이 부산 지역 변호사 회식 모임에 나가 자신을 비아냥대는 동료 변호사들의 얘기를 들으며 모른 척 능청을 떨지만 살짝 움츠려들어 있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송강호의 송우석을 좋아하게 된다. 곧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목소리를 깔면서 송강호의 송우석이 명함을 동료들에게 건네며 애써 무게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송강호는 그 인물에게서 순간적으로 긴장을 쑥 빼내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우리가 일상적인 공적 영역에선 잘 보여주지 않는, 의식적으로 감추려 하는 모습을 송강호는 태연하게 제시하며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친근감을 준다. 긴장과 이완은 같은 장면에서도 자유자재로 반복되며 공적인 경직성과 사적인 이완이 주는 두 얼굴의 묘한 느낌은 그가 연기하는 모든 인물에게 송강호의 아우라를 입힌다.

송강호의 진가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 사이클에서 빠져나와 그가 강한 파토스를 입히는 폭발적인 순간에 최고조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변호인>에서 특이한 것은 이 영화의 중반 이후에 송강호의 연기가 활시위를 탱탱하게 잡아당긴 채로 펼쳐지는 느낌을 주는데도 전혀 피로감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전반부에 풀어놓은 인간적인 허점을 플롯의 급작스런 반전 흐름을 따라가면서 삽시간에 메워 수습하고, 매번 입바른 소리만 하는 정의로운 변호사로 탈바꿈한다. 극적인 연설을 지속적으로 풀어놓는 인물을 연기하는데도 인간적인 매력을 놓치지 않는다. 곽도원이 연기하는 고문 경찰 간부의 경직된 얼굴, 가끔 느물거리지만 대체로 가면을 쓴 것 같은 이물감을 주는 악당의 거센 존재감이 없었으면 송강호의 집중력도 화면을 버티어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송강호의 송우석은 영화 중반 이후에 전혀 웃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는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이적 표현물인지 여부를 두고 벌이는 법정에서의 희극적인 설전에서도 송강호는 빙빙 원형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안에서 전혀 긴장을 놓지 않는다.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그 이상한 희비극성을 지탱하는 이 인물의 내면적 몰입도는 이제까지 송강호의 연기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변호인>은 노무현의 신화를 배우 송강호가 순화시켜 새롭게 제시하는 영화 속 이상주의자의 신화이다. 영화의 중반부는 물론, 거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나는 할리우드영화에선 곧잘 가능했지만 한국영화에선 난망했던 이상주의적 영웅의 탄생 스토리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노무현의 실화에 얹힌 것이긴 하나 송강호는 그걸 순전히 자신의 배우적 역량을 통해 한 인간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곽도원의 악질 경찰과 송영창의 현실영합형 판사의 질긴 관성을 통해 권력에 봉사하는 기득권의 힘이 얼마나 센 것인지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면 된 것 아닌가. 앞서 말한 에필로그는 다시 현실의 복잡한 맥락으로 관객인 나를 데려다놓고 장탄식하게 만든다. 저랬던 저분은 왜 그 뒤 이 나라의 최고 권력까지 얻었는데 뭔가를 바꿔놓지 못했던 것일까. 그게 저분의 한계가 아니라 이 사회의 한계라면 우리는 무얼 할 것인가. 그런데 젊은 시절의 저분의 뒤에 있던 늠름한 변호사들은 지금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저 연대의 감동이 특정 정파의 연대로 수렴되는 효과로 갇힌다면 그건 또 어쩔 것인가. 지금 세상에서 특정 정파의 연대로 오해될 만한 선동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나는 우울해졌다.

‘결말의 여백’을 만들어낸 송강호의 육체

괜한 트집을 잡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현재의 한국 사회에 유의미한 파장을 일으킨,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에 서려고 한 훌륭한 대중영화라고 생각한다. 당장 내 주변의 반응을 봐도 이 영화의 선동성은 대중성이라는 보편적 호소력으로 소화됐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 영화에서 다뤄진 1980년대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현재형이라는 걸 받아들인다. 여기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한 건 상식적인 분별능력의 유무에 가깝다. 이 영화는 중반에 나오는 송우석의 대사처럼 이러면 안 되는 것이며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는 사리분별 태도의 유무를 묻는다. 끔찍하게도 우린 그런 상식이 부재한 정치적 암흑기를 오래 겪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그 암흑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이 절망의 시대에 <변호인>은 상식이라는 단단한 전제를 붙들고 한 인간의 진화를 보여주며 이상주의적 영웅의 일대기를 설득시켰다. 여기서 현실정치와 정파가 어른거리는 순간 다시 분별력이 사라진다. 나로 말하자면,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늘 만년 야당의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 민주당을 줄곧 지지하며 동시에 실망하는 사람으로서, 에필로그를 보고 정치인 노무현의 그림자가 현재에 쑥 손을 뻗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순진하고 현실정치에는 무기력했던 노무현을 마음으로 떠나보내고, 이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던 한 보편적 이상주의자의 원칙을 가슴에 새기고 싶었던 나는 가슴에 돌덩이가 들어서버렸다.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면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지금은 당장 패배하지만 마침내 정의가 이길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는 카타르시스를 주고자 한 것으로도 보인다. 법정 재판에서 송우석은 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변호사의 신분으로 시위대의 맨 앞에 서는 활동가가 된다. 현직 법조인으로서 구속 수감된 그가 당당하게 맨 앞에 서 있고 그 뒤를 많은 이들이 지지하고 있는 장면이 주는 울림은 적지 않다. 관객은 이 결말을 통해 정의는 부당한 권력에 굴하지 않는다는 희망을 받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에 <카이에 뒤 시네마>를 축으로 유행한 모더니즘 영화이론의 주장은 이런 산뜻한 카타르시스에 정치적 각성효과가 있는지 의문시했다. 관례적인 닫힌 결말의 법칙을 적대시한 모더니즘 이론은 현실의 영화적 세 확장 면에서 정반대의 답을 받고 고민했다. 미학적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는 대중적으로 거의 반응을 얻지 못했고 이는 현실 정치의 개혁에 미미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이론적 쟁투에서 우리가 영감을 받는 건, 결말의 여백을 여하히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영화의 생명력이 길게 담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중적인 스토리텔링의 정석은 우리 편과 상대편을 정해두고 그 사이의 갈등과 대결을 그리며 궁극에 우리 편이 승리하는 걸 그린다. 설령 지더라도 우리 편이 윤리적으로 옳다는 믿음을 관객에게 심어준다. 관객인 우리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편에 쉽게 동화되는 것을 원하고 주인공 편이 아닌 상대편을 대상화하며 그들을 심리적으로 단죄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대다수 뉴스를 소비하는 대중의 정치적 심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변호인>에서 이런 스토리텔링의 재미와 감동 외에 내가 감정과 의미의 여백으로 받아들인 건 송강호의 얼굴과 육체다. 이미 충분히 다른 많은 영화들에서 그를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전형적인 선한 영웅의 진화 스토리에 매몰되지 않는 그 고유의 인간적인 광휘를 본다. 나는 앞으로도 <변호인>을 떠올리면 송강호의 적당히 눈치 보는 전반부의 약삭빠른 표정과 후반부의 슬픈 싸움꾼의 표정을 기억할 것이라고 예감한다. 이것이 배우의 위대한 점이다.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그 자신의 배우로서의 매력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그것들은 제대로 화면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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