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힘을 내서 노래하세요

시궁창 같은 삶에서 건져올리는 희미한 낙관, <인사이드 르윈>

<인사이드 르윈>의 마지막 장면에는 밥 딜런이 나온다.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가 노래하는 가스등 카페에 르윈 데이비스 차례 다음으로 밥 딜런이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때, 르윈 데이비스는 밖에 정장 입은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걸어나간다. 르윈은 걸으면서 밥 딜런의 노래 모습을 본다. 르윈의 시점으로 밥 딜런이 보인다. 그는 “안녕”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밖에 나온 르윈은 전날 그가 무대에 오른 시골 할머니 가수를 실컷 모욕한 것을 복수하러 온 그녀의 남편에게 얻어터진다. 밥 딜런의 노래는 계속 화면에 흐르는데 르윈은 호되게 당하고 거구의 그 남자에게 “우린 빠질 테니 계속 시궁창에 살아라”라는 악담을 듣는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떠나고 르윈은 프랑스 말로 작별 인사를 한다. 밥 딜런의 노래는 계속 깔린다.

르윈의 자기학대 같은 농담

이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조응하는 장면이다. 감독 코언 형제는 이 마지막 장면의 일부를 첫 장면에 옮겨놓고 시작했다. 이 수미상관 구조를 잇는 것은 르윈 데이비스의 일주일간의 유랑기다. 그는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고 시카고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실패하며 다시 배를 타려다 그것도 안 되자 무대에 선다. 감당하기 힘든 피로와 좌절과 자괴감으로 채워진 일상이지만 그렇다고 나아질 것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밥 딜런은 크게 성공할 것이다. 르윈은 그렇지 못하겠지만 무명의 음악인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그를 우리가 동정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르윈 데이비스는 인간성 면에서는 최하의 인간에 가깝다. 남의 신세를 지면서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친구의 애인을 임신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누나에게도 원수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이 영화엔 예술가와 예술가의 인생에 대한 미화가 없다.

르윈뿐만 아니라 르윈 주변의 무명 예술가들 군상이나 그들의 후원자들도 어딘가 이물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진은 음악 동료 짐과 동거하는 사이인데 르윈의 아이를 임신하고 짐 몰래 낙태하려고 한다. 르윈이 잠을 청하러 올 때마다 온갖 악담을 퍼부어대는 진은 당연히 르윈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지만 그녀가 언뜻 자기내면의 욕망을 드러낼 때 르윈은 그녀가 너무 속물적인 거 아니냐고 타박을 준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땐 천사의 강림과 흡사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녀가 입에서 더럽고 거친 욕을 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 클럽 사장은 그녀와 자고 싶다고 음담패설을 한다. 뿐만 아니라 객석의 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자고 싶어서 자리를 채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며칠 뒤에는 진과 잠자리를 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르윈에게 떠벌린다. 그 말의 신빙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무명 예술가가 처한 불안한 위치에 맞설 힘이 그녀 자신에게 거의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 진 역시 르윈만큼이나 자신의 삶에 힘들어한다.

르윈이 소속된 회사의 사장 멜은 귀가 잘 안들리는 노인인데 거의 완벽하게 무능한 매니저다.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가 잘 안 들리는 할머니 비서를 두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가수에게 돈을 줄 수 없는 악랄하고 무능한 경영자로 평판이 나 있는 것 같다. 르윈에게 수호천사인 골파인 교수 부부는 무골호인들이지만 그들 역시 자기 멋에 취해 사는 예술애호가들일 뿐이다. 르윈이 찾아갈 때마다 종종 그들의 집에는 예술애호가들이 손님으로 와 있는데 하나같이 타인의 존재에 무심한 인간들이란 인상을 준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르윈은 골파인 부부에게 저녁식사 대접을 받고 다른 손님들에게 노래를 불러달라는 청을 거의 강압적으로 받는데, 르윈이 예전 듀엣 시절 불렀던 곡을 부르자 골파인 교수의 부인이 아름다운 화음을 넣는다. 르윈은 참지 못한다. “내가 미친놈이지. 이건 내 직업이에요. 염병할 애들 재롱이 아니라고요. 제가 교수님 저녁 초대해서 강의해달래요? 이건 내 직업이에요. 그래도 난 명색이 프로라고요.”

당황한 골파인 교수의 부인이 자리를 뜨자 미안해진 르윈은 집 떠날 채비를 하는데, 부엌에서 부인의 비명이 들린다. 르윈과 함께 집을 나갔다가 르윈이 찾아온 그 집 고양이는 실은 다른 고양이였다. 골파인 교수의 부인은 고양이를 들고 나와 고환은 어디 있느냐고 소리친다. 골파인 교수 댁 고양이는 수컷이었다. 이보다 나중에 골파인 교수 댁의 그 고양이는 저 혼자 힘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그 고양이의 이름은 율리시스였다. 르윈은 그 고양이의 이름을 듣고 멍한 상태에 빠진다. 일종의 코언 형제식 조크인데, 죽도록 고생한 것은 르윈만이 아니었다. 고양이 율리시스 역시 르윈이 일주일 동안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새우잠을 청하고 오디션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유머, 단 한번도 단일한 감정에 빠지게 하지 않는 복잡다단한 인물들의 행동과 말을 쏟아내는 것이야말로 코언 형제식 인간 이해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르윈은 늘 힘든 상황에 있지만 계속 자기학대에 가까운 농담을 한다. 그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그의 말과 행동은 주변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르윈이 배를 타려고 했을 때 선원 자격증이 없어서 안된다고 하자 르윈은 내가 공산주의자라서 안되느냐고 농담 섞인 항의를 한다. 상대편은 은밀하게 어느 계파냐고 묻는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르윈은 다시 반문하지만 답변을 듣지 못한다. 르윈이 지하철을 탔을 때 그를 심술궂게 바라보는 중년 남자의 시선은 골파인 교수 아파트의 승강기 관리원의 얼굴로 연결되기도 하고 르윈이 누나 집에서 경우 없는 말을 하다가 누나에게 타박을 받고 조카에게 자신이 진짜 나쁜 놈이라고 농담을 건네자 조카는 진지하게 수긍한다. 이 몰이해와 적의는 르윈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르윈 또한 그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견뎌내는 기개가 있다.

감정의 수식 없이도 폭발하는 에너지

<인사이드 르윈>이 신기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 영화에 낭만적인 정조는 전혀 없지만 주인공의 고단한 삶의 여정의 끝에서 부정을 통한 긍정, 시궁창 같은 삶에서 건져올리는 희미한 낙관 같은 걸 얻을 수 있다. 르윈 데이비스와 그의 주변 동료들의 삶은 하나같이 후줄근하다. 그들의 재능은 돈으로 보상받지 못한다. 그들은 현재의 삶의 가난을 미래의 성공을 위해 견디는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르윈 데비이스를 포함해 대다수 영화 속 음악인들은 그런 감각조차 잃어버렸다. 현재 어디에 있고 미래에 어디에 있을 것인지 그들 스스로의 삶이 잘 가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견디면서 자기들의 삶 못지않게 처절한 주변 삶을 무감한 듯 응시한다.

사는 게 극심하게 피로한 상태에서 세속적인 어떤 경구도 다가오지 않고 낭만적인 온기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그저 상호적대와 무관심이 일상적인 예술가 커뮤니티에서 그들은 어떤 초현실적 상황이 와도 그런가보다 한다. 르윈이 오디션을 보러 시카고로 향할 때 차를 얻어 탄 동행들은 거구의 재즈 뮤지션과 그의 매니저인데 이들은 르윈의 포크송에 전혀 무관심하며 심지어 경멸을 보이기도 하고 그들 자신은 이상한 헛소리만 해댄다. 존 굿맨이 연기하는 재즈 뮤지션 롤랜드 터너는 끊임없이 장광설을 펴거나 잠에 곯아떨어진다. 조니라고 불리는 그의 매니저는 제임스 딘을 흉내내면서 줄담배를 피우고 ‘항문시’라고 이름 붙인 이상한 시구를 혼잣말로 읊조린다. 르윈도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 뒷좌석에서 자신을 자꾸 지팡이로 괴롭히는 롤랜드에게 르윈이 항의하자 롤랜드는 코웃음치며 말한다. “난 세상이 흑마술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배웠지. 어느 날 네 옆구리가 쑤실 거야. 네 인생이 갈수록 개떡 같아질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을 때 롤랜드 터너는 멀리서 웃고 있을 걸세.”

르윈을 포함한 인간들의 이 자기도취적인 에너지의 발산에 대해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 감독도 어떤 반응을 하지 않는다. 감정적 수식이 없는 화면들의 연결은 계속 중첩돼 쌓여가면서 점점 굉장한 에너지를 머금게 된다. 시카고에서 돌아온 르윈이 선원 자격증을 재발급받고 직원에게 아버지 안부를 묻는 인사를 들은 뒤 오랜만에 아버지가 요양하는 곳을 찾는 장면도 대단하다. 르윈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버지에게 예전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노래를 불러주는데 시체처럼 앉아 있던 아버지는 곡의 중간에 극적 반응을 보인다. 르윈의 노랫말은 이랬다. “오! 화창하고 즐거운 날이었지 난 야머스 항에서 여행길에 올라 꼬마 선원이 되어 돛단배를 타고 어여쁜 청어떼를 찾아 나섰네 이제 갑판에 올라선 어엿한 어부라네 남자답고 당당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며 어여쁜 청어떼를 낚고 있구나 스스로 돈을 벌어 앞가림을 하고 갈아입을 옷을 사고 백만 마일을 항해하며 물고기 천만 마리를 잡았다네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청어떼 우린 밤낮으로 바다와 싸우네 바람이 불어도 잔잔해도….” 르윈의 노래가 이만큼 흘렀을 때쯤 아버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퍼진다. 르윈의 노래는 계속된다. “… 돌풍이 불어도 땀에 젖어도 추워도 나이가 들어 늙어가도 죽을지라도 우린 청어떼를 꿈꾸며 사네.”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이 장면은 아마도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을 아버지와 아들이 잠깐 화해하는 광경일 텐데 노래가 끝나자 아버지는 바지에 오줌을 싼다. 르윈은 그 자리를 서둘러 도망쳐나온다.

르윈은 왜 노래를 계속하는 것일까

주인공 르윈이 노래 부르는 이 영화 속 대다수 장면은 거의 전곡을 그대로 들려준다. 노래가 중간쯤 흐르면 청중의 반응을 잡는다. 그 반응 화면들 가운데 아버지가 보인 모습이 가장 극적이었다. 그러나 르윈은 아버지를 위해 그 노래를 부른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 감상적인 노래의 끝에 보인 아버지의 반응을 보고 르윈이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건 계속 영화를 보면서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르윈은 그토록 고단한데 왜 노래를 계속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 같지도 않다. 르윈이 처음과 끝에 부르는 노래 <날 매달아주오>의 가사는 슬프다 못해 처절하다.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지만 여하튼 세상 구경 잘했다는 체념이다. 다른 노래들도 대체로 애상적이며 상실과 구원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노래들을 듣는 청중의 반응은 그냥 그렇다. 무엇보다 르윈이 청중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이 그렇다. 그는 진과 짐이 노래를 부를 때도, 자신이 세션으로 참여한 노래 <미스터 케네디>의 악보를 처음 접할 때도 심드렁하다.

르윈은 오직 자신이 노래를 부를 때만 집중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르윈은 어느 때보다 자기 노래에 집중하는 것 같다. 이때까지 코언형제가 노래하는 가수와 청중의 반응을 이어붙였던 방식도 이 장면에선 다르다. 청중의 모습이 잡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직 르윈이 노래하는 모습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르윈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듯이 보이고 그의 일주일간의 힘든 일상을 봤던 우리는 그 모습에 얼마간 감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화는 곧이어서 르윈이 밥 딜런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는 걸 담고 어느 아마추어 여가수의 남편에게 실컷 얻어터지는 걸로 끝낸다. 굳이 대전제를 내걸고 묘사하지 않은 이 영화는 예술한다는 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렇지만 누군가 이렇게 힘을 내 노래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복합적으로 그려낸다.

거기 방점을 찍는 것은 르윈의 고단한 여정에 포개지는 고양이 율리시스의 여정이다. 영화 중반 고양이 율리시스는 화면에서 사라졌지만 아마도 르윈 못지않게 힘들게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겪는 힘든 일들을 곧잘 상처를 수식하는 온갖 언어로 치장하곤 한다. <인사이드 르윈>의 대단한 점은 그 언어의 수식을 거부하는 중층적인 캐릭터와 사건의 덩어리들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고양이의 여정과 등치시킨다는 점이다. 일주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진을 찾아간 르윈은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 난 지쳤어. 지쳐 죽을 것 같아. 하룻밤 잘 자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그러곤 다시 교수 집을 찾아가는데 거기엔 잃어버린 줄 알았던 고양이가 돌아와 있다. 르윈의 노랫말대로 어떤 잣대로 들이대면 불행한 삶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세상 구경 잘한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에서 정의하지 않고 뭉개는 이 에너지는 음악에 실려 상당한 공명을 자아낸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