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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진실이 고통 이미지를 만났을 때

<노예 12년>이 떠올린 생각들

<노예 12년>

<노예 12년>은 평판이 좋다. 올해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으며, 김영진과 김혜리도 지난호(945호) <씨네21>에 호의적인 글을 썼다. 나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노예 12년>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이 있지만 관습적인 화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류영화라고 생각한다. 수작 혹은 범작. 서로 견해를 경청하는 평자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의 견해 차이가 생기는 일은 드물지 않다.

다만 이 영화는 몇 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노예 12년>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거의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우리의 자리를 생각해보고 싶다. 그 자리는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한편의 영화 앞에서 종종 잊는 종류의 상식에 가깝다. 다소 원론적이고 뻔한 말이 되더라도 그 상식을 한번쯤 짚고 싶다. 물론 이건 <노예 12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선뜻 호의를 가지기 힘든 간접적인 이유의 하나는 될 것이다.

1. ‘실화에 근거한’이라는 것

‘This film is based on a true story.’

시작 장면에 등장하는 이 자막은 낯익다. 이 영화는 실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많이 봐와서 무심하게 지나쳐온 이 문장의 의미를 한번 짚어보고 싶다. ‘실화(true story)에 근거한’이라는 말이 단순히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정보에 불과한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매튜 매커너헤이에게 올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도 실화에 근거했지만, 거기엔 이 자막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쪽에선 필요한 자막이 왜 다른 쪽에선 필요하지 않았을까.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영화들이 시작 장면에서 내세우는 언명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 드물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체인질링>처럼 ‘근거한’(based on)이라는 표현 없이 그냥 ‘실화’라고 밝히는 것. 두 번째, 가장 흔한 사례로 <노예 12년>처럼 ‘실화에 근거했다’라고 말하는 것. 세 번째, <변호인>처럼 ‘실화에 근거했지만 허구’라고 밝히는 것.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다(inspired)’는 표현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네 번째,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처럼 아무런 언명을 하지 않는 것 등이다(정반대의 예로는 ‘이 영화는 온전한 허구이며 그럼에도 실제 사건과 인물을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전적인 우연의 일치’라고 밝히는 것이다. 이 자막은 할리우드 고전기 영화들에서 종종 등장한다).

이 언명의 미묘한 차이를 단순히 실화와 허구의 비중 차이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첫 번째 사례가 실화의 비중이 가장 크고 뒤로 갈수록 허구의 비중이 커진다. 실제로 그 비중을 밝힐 목적으로 이 자막을 사용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그 비중 차이를 감안하지 않으려 한다. 보통의 관객에게 실화와 허구의 비중 차이라는 것은 인지되기 어려우며, 그것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한편의 극영화는 근본적으로 허구의 성격을 지니며, 실화의 ‘양적 비중’이 그 허구라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람 체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위의 언명들은 공통적으로 관객에게 특정한 태도를 은연중에 요청한다. ‘실화이다’ 혹은 ‘실화에 근거했다’는 언명은 우리를 구경꾼이 아니라 목격자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밀한 도덕적 명령이기도 한데, ‘당신이 봐야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화를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 사회성 드라마이며 도덕적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요청은 일견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진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사건 현장을 찍은 사진도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자본과 기술과 인력이 투입되고 여러 단계에서 창작자의 계획과 직관이 배우들과 스탭들의 역량을 통제하고 조정해 산출한 허구의 서사, 조작된 이미지이다. 영화는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조작적인 분야다(여기서 ‘조작적’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가장 조작적인 영화가 실제 사건과의 동일성(‘이것은 실화이다’), 유사성(‘이것은 실화에 근거했다’)을 표방할 때, 그것을 보는 우리는 목격자인가, 감상자인가. 달리 말해, 우리는 목격자로서 그 실제 사건에 반응하는가, 아니면 감상자로서 그 텍스트의 자질에 대해 반응하는가. 관객인 우리의 자리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

2. ‘실’(實)과 ‘화’(話) 사이

이 애매성의 정체를 말하기 위해선 얼마간 상식적이고 원론적인 수준의 논의를 피하기 힘들 것 같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앞서 말한 언명들 가운데 <노예 12년>이 채택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실화에 근거한’이라는 표현을 뜯어보자.

이 표현은 ‘실화’와 ‘근거한’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실화부터 살펴보자. 실화(實話, true story)는 ‘실’(實, true)의 ‘화’(話, story),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는 뜻이다. <노예 12년>의 경우, 노예제 폐지 직전, 자유인이었다가 납치되어 12년의 노예생활을 한 흑인 솔로몬 노섭이 쓴 동명의 책이 그 실화에 해당될 것이다. 나는 이 문단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고 바꿔쓰고 있다. 사건은 그것을 육체적 감각으로 경험한 당사자들 외엔 물리적 실체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로 경험된다. 이것은 해당 사건의 시공간을 공유한 인물들 외엔 누구도 근본적으로 목격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사자가 전하는 진솔한 이야기라면 그것은 실제 사건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가, 라는 소박한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반론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알려진 합리적 반증(反證)이 없는 한 그 이야기에 담긴 사건의 개요를 대체로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실’(實)과 ‘화’(話)는 발화자인 당사자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 경우에도 일체가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언어의 자의성에 관한 기호학적 지식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 자신이 겪은 사건을 말하거나 쓴 경험을 돌이켜봄으로써 수긍할 수 있다. 우리는 일기를 쓸 때조차 완벽하게 솔직해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하루의 사건들에 낮은 층위에서라도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취사선택, 과장 혹은 미화의 과정 속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이것은 일기나 수기, 자서전조차 넓은 의미의 허구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모종의 허구를 경유하지 않고 우리가 겪은 사건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전기양식은 행동들과 상태들 사이뿐만 아니라 현실과 허구 사이의 이중적 판별불가능성의 특권적 장소”(<문학의 정치>)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전기양식’을 자전적 기록으로 대체해도 유효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허구는 거짓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관한 건 아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사례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이다. 교육철학서 <에밀>을 쓴 저자가 자신의 다섯 아이를 고아원에 버린 사실까지 진술하는 이 자서전은 “저는 선과 악을 똑같이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는 그 사람보다 선량했습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면 당신께 말하게 하소서”라는 간증의 언사로 시작해 절도와 무고를 포함한 자신의 파렴치한 악행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당대의 논적들과 후대의 연구가들은 이 전대미문의 솔직한 고백조차 변명과 누락된 사실투성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지적은 설사 객관적이라고 해도 초점을 빗나간 것이다. 이 결함은 고백록이라는 양식에 내재한 것이며, 누구도 그 결함 없이 고백할 수 없다. 루소는 참회하면서 변명한다. <고백록>의 위대성은 저자가 법정이 증인에게 요구하는 ‘진실만을 그리고 모든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참회하는 자의 정체성과 변명하는 자의 정체성 사이의 분열을 끝내 버텨내며 어느 쪽에도 우선권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내면적 독백의 비중이 큰 <고백록>과 사건의 기록에 집중한 <노예 12년>은 초점이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둘의 거리는 생각만큼 멀지 않다. 양자 모두 개인의 육체적 심리적 경험을 플롯의 근간으로 삼는다. 근대소설은 “플롯을 자전적 회고록 양식에 완전히 종속”시키며 “개인 경험의 절대 우위”를 단언한다(이언 와트, <소설의 발생>). 영화 <노예 12년>이 채택하고 있는 고전적 할리우드 양식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도 자전적 회고록 양식이다. 자서전, 근대소설, 고전적 할리우드 양식은 서사의 방식에서 연속성이 있다.)

요컨대 ‘실’은 취사선택과 허구가 개입해 ‘화’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실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솔로몬 노섭의 자전적 기록에서 사실과 허구는 식별불가능하다. 그가 쓴 <노예 12년>이라는 실화가 어떤 사실들을 버리고, 채택된 사실들의 서술에서 어떤 허구가 작용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노섭의 기록 앞에서 우리는 이미 감상자와 목격자의 자리를 분간할 수 없다.

하지만 일기, 수기, 자서전 등의 자전적 기록 앞에서 이 식별불가능성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그 기록들에서 사건과 풍경은 기록자와 독립된 객관적 세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기록자는 사건과 풍경을 보는 투명한 창이 아니다. 그는 사건과 풍경에 연루되어 있고, 우리는 그와 함께 그리고 그를 통해 사건과 풍경을 접한다. 우리는 그 기록이 그가 구성한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그 기록의 언어들에서 만나는 진정한 대상은 사건의 진실에 관한 조서가 아니라, 그 기록자의 언어에 담긴 세계와 사건의 즉각적인 표정이고 인상이며 무늬다. 여기에선 주관과 객관이 분리될 수 없다. “살이 에이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츠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난중일기>, 1594년 1월20일)라고 이순신이 쓸 때, 그는 단 한마디의 평가도 감상도 없이 오직 객관적 조서의 언어만 쓰고 있지만, 바로 그 엄격함 때문에 우리는 이 짧은 글에서 이 언어를 쓰고 있는 사람, 분노와 고통을 삼키며 일기에서조차 발설하지 않으려 하는 과묵한 단독자를 동시에 만난다.

그런 점에서 자전적 기록의 최고의 양식은 일기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의 비전문가인 나로서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모두 걸작이다”라는 곰브리치의 말에 빗대어 모든 일기는 위대한 문학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이 말이 섣부르고 과도하다면, 적어도 모든 일기는 흥미롭다고 말하고 싶다. 일기가 가장 객관적(‘實’)이어서가 아니라, 주관과 객관의 식별불가능성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좀더 긴 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을 정리하는 수기, 한 사람의 일생을 정리하는 자전 혹은 전기는 사실들을 취사선택하고 선택된 사실들을 가공하는 모종의 목적지향적인 허구적 틀이 객관적 기준을 가장해 점점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실화’들 앞에 선 우리의 거처는 감상자와 목격자 사이에서 점점 불투명해진다.

3. 고통 이미지의 출현

‘실화’ 다음에 등장하는 ‘근거한’이라는 표현은 그 애매성을 배가한다. 나는 솔로몬 노섭의 기록을 보지 못했다. 그것을 읽은 김혜리의 촌평을 보면 영화보다는 훨씬 풍부하리라 짐작된다(<씨네21> 945호 참조). 하지만 내용의 비교는 이 영화에 관한 한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가 실화에 근거한다고 언명할 때, 그것은 사실들을 첨삭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엔 모종의 질적 변화가 있다. 문자로 정리된 이야기가 실제적 시공간에 담긴 육체의 움직임으로 변하는 것이다. ‘실’과 ‘화’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과는 다른 차원의 불연속성이 ‘근거한’의 과정에 놓여 있다. 이 이중적 불연속성이 관객인 우리의 자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문자 기록 <노예 12년>이 아니라 극영화 <노예 12년> 앞에 서 있다. 어떤 묘사적 언어도 따라잡을 수 없는 현재적 시공간과 살아 있는 육체로 재현된 솔로몬 노섭을 만나는 것이다. 그의 슬픈 이이야기는 고도로 정련된 이미지와 사운드로 우리에게 육박해온다. 우리는 읽는 게 아니라 감각한다. 이제 실화(實話)는 실감(實感)의 문제가 된다. 영화는 실제 세계의 이미지와 동질적인 시청각 이미지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우리는 이제 목격자와 동질적인 경험의 장에 입회한다. 실화에 근거한 한편의 영화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종종 목격자로 오인하는 것은, 그것의 진실성이 아니라 영화 이미지의 특별한 능력 때문이다. 읽고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들었다고 믿게 만드는 그 능력은 유능하고도 위험하다.

자전적 기록에선 우리가 그 기록을 통해 기록된 세계와 그 기록자를 함께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끝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기록한 세계와 자신을, 기록자 스스로 선택한 언어로만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화에 근거한’ 영화는 ‘실’이 ‘화’와 ‘근거한’이라는 이중적 불연속의 벽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육박해오는 것으로 믿게 만든다. 여기서 ‘근거한’이 함축한 불연속성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하게 물어볼 수 있다. 영화 <노예 12년>은 누가 말하고 있는가. 기록 <노예 12년>에서는 솔로몬 노섭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영화 <노예 12년>에서 이야기하는 주체, 보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영화의 내레이션을 둘러싼 까다로운 논의와 연관돼 있다. 영화는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 광학적 시점의 주체와 이야기하기의 주체가 분열하고 중첩되고 엇갈리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한 한 기댈 만한 확정적인 논의는 없다. 하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잠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광학적 시점의 주체는 언제나 카메라이며(등장인물의 시점숏에서조차도), 그 카메라를 통제하는 것은 감독이다. 또한 이야기를 데쿠파주하고 촬영된 장면을 편집해 내러티브를 결정하는 주체 역시 감독이다. 따라서 영화의 최종적 화자는 결국 감독이다.

요컨대 영화 <노예 12년>은 솔로몬 노섭이 아니라 스티브 매퀸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면에서만 보면,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노섭의 이야기를 읽고 난 뒤, 그것을 우리에게 ‘그랬다’가 아니라 ‘그랬다고 하더라’라고 들려주는 사람이다. 화자가 체험자에 서 전달자로 교체된 것이다. 이것이 ‘근거한’의 과정에 개입된 근본적인 불연속성의 한 측면이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이상 기록자의 언어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주관과 객관이 식별불가능한 그 단독자의 언어 대신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실제 세계의 이미지와 동질적인 영화 이미지의 능력은 만드는 이에게나 보는 이에게나 모두 유혹적이다. ‘실’과 ‘화’ 사이, 그리고 ‘근거한’이라는 사이의 이중적 불연속성을 넘어 ‘실’이 관객에게 직진하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것. 다시 말해 언어가 수행하지 못한 감각의 강도 혹은 실감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는 것. 이것이 ‘실화에 근거한’ 대부분의 영화가 이기지 못하는 유혹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중영화에서 가장 까다로운 의제 가운데 하나인 고통의 이미지라는 문제와 만난다. 육체가 고통을 느끼는 순간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것만큼 ‘실’을 효과적으로 육박하게 만드는 방법은 드물며, 그것은 영화 이미지가 가장 유능한 분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실화에 근거한’ 영화에서 한 자연인이 경험한 육체적 고통을 영화 이미지로 ‘재연’한다는 것에는 중대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공포와 혐오로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즐기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우리 누구도 그것을 즐기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의 감각은 그 앞에서 쾌와 불쾌 사이를 동요한다. 우리의 이성은 불쾌를 승인하고 쾌를 억누르지만 그것은 억압될 뿐 제거되지 않는다. 고통의 이미지는 미혹적(迷惑的)이다. 만연한 폭력 이미지 중에서도 고통의 이미지, 그중에서도 육체 손상 이미지는 가장 미혹적이다. 예컨대, 영화 <노예 12년>에서 솔로몬 노섭이 악랄한 주인의 강요에 못 이겨 여자 노예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그녀의 피가 튀고 살이 파진 그녀의 등이 보일 때, 우리는 온전히 고통받는 그녀의 자리에 서서 그 고통을 공감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고통의 이미지, 그중에서도 신체 손상 이미지의 문제가 까다로운 이유는 그 이미지를 따지고 있는 내가 그 이미지를 원하고 그 이미지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의 대중영화에서 보는 신체 손상 이미지들이 허용된 것은 불과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폭력의 피카소’(샘 페킨파)와 ‘헤모글로빈의 시인’(쿠엔틴 타란티노)을 응원했으며,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영화 이미지에 가해지는 어떤 규제도 반대했고 앞으로도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옹호한 영화가 앞장서 유포한 신체 손상 이미지의 만연으로 우리의 감각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앞서 예로 든 <노예 12년>의 채찍질 장면이 만일 1950년대 관객에게 보여졌다면 그것만으로 하나의 스캔들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의 우리에게 진짜 문제는 그 이미지가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은 그 정도 장면이라면 대수롭지 않거나 참을 만하다고 느끼게 된 우리 감각의 둔화에 있다. 이것은 잔인하고 끔찍한 것을 즐긴다는 저속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고통의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감각 둔화가 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공감 저하와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실감을 위해 이미지는 더 강해지려는 유혹에 빠진다. 언어도 그 유혹을 느끼지만 이미 주어진 어휘들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강도에는 끝이 없다. 실화를 실감의 세기, 이미지의 강도로 대체한 가장 끔찍한 사례 가운데 하나는 역시 ‘실화에 바탕한’ <시티 오브 갓>(2002)이다. 총알이 몸속을 헤집는 장면까지 시각화한 이 영화를, 그 높은 평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에 비하면 <노예 12년>은 온후하고 세련된 화술의 영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가 고통의 이미지를 등장시키는 장면에서 여전히 망설이게 된다.

앞에서 자전적 기록에서의 주관과 객관이 식별불가능한 단독자의 언어 대신, 그것을 제3자로서 전달하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나는 그 대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여전히 이미지의 강도와 고도의 실감 대신 영화 이미지의 환기력이라는 또 다른 훌륭한 능력에 기대를 걸고 있다. 다른 지면에서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실화에 근거한’ 영화 가운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는 존 포드의 <젊은 날의 링컨>(1939)이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난반사하는 이미지들의 환기력으로 실화를 실감의 서사가 아니라 위대한 허구의 세계로 재창조했다. ‘실화에 근거한’ 오늘의 영화들이 그 이중적 불연속성과 대면하는 방식에서 이 영화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여전히 믿는다.

영화 <노예 12년>에서 마음을 움직인 한 장면에 관한 감상을 덧붙이고 싶다. 가족과 재회한 뒤 영화가 끝나고 솔로몬 노섭의 이후 이야기가 자막으로 떠오른다. 납치자들을 고발했으나 패소했고 자신처럼 납치된 흑인들을 구조하는 활동을 전개했다는 내용이 차례로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떠오른다. “그가 죽은 날짜, 장소,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검은 바탕에 희고 작은 알파벳으로 새겨진 이 간결한 문장,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다’(unknown)는 마지막 단어가 무겁게 사무친다. 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이 마지막 장면의 검은 무지와 흰 글씨, 그리고 그 단순하고 외로운 단어야말로 오늘의 한 창작자가 오래전 부당하게 고통받은 한 인간에게 바치는 최대한의 그리고 아름다운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무지 화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영화 이미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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