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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야기의 욕망에 봉사하는 색정증

성적 욕망을 압도하는 <님포매니악>의 서사적 욕망에 관하여

음침하고 적막한 골목의 차가운 바닥에 한 여인(조)이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다. 노년의 남자(샐리그먼)가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여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탓하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잠시 망설이다가 벽에 꽂힌 낚싯바늘로 시선을 돌린다. 남자가 플라이 낚시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며 아이작 월튼의 책, <조어대전>을 언급한다. 그러자 여자가 말한다. “이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겠어요. 대신 내 이야기 전부를 해야 할 거예요. 길고 비도덕적인.” 그리하여 여자의 과거가 열리며 ‘조어대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첫장이 시작된다.

<님포매니악>(이 글에서는 1부와 2부 모두를 포함한 제목으로 쓸 것이다)은 조와 샐리그먼이 대화를 나누는 한정된 공간의 현재와 조의 성욕 넘치는 과거를 오가며 진행된다. 조의 내레이션으로 과거가 제시되고 현재로 돌아오면 샐리그먼은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경유해서 그 과거를 해석한다. 샐리그먼의 방에 있는 사물들, 이를테면 그림이나, 책, 성화, 거울, 심지어 벽에 생긴 얼룩 등이 조의 특정 기억을 끌어내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런 식으로 조의 색정광 연대기는 총 8개 장으로 나뉘어 구술된다. 이 영화를 도식화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샐리그먼을 분석자의 위치에, 조를 피분석자의 위치에 둔 다음 전자를 이성, 질서, 지식욕, 해석, 남성성 등의 상징으로, 후자를 육체, 혼돈, 성욕, 고백, 여성성 등의 상징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물론 라스 폰 트리에는 관계의 권력과 우월성을 샐리그먼에게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는 샐리그먼의 진지하고 심오한 언어와 논리를 종종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이 영화의 유머는 대개 그런 순간에서 온다. 말하자면 <님포매니악>에서 두 인물의 구도는 정신분석의 실패기로 자주 인용되어온 프로이트의 ‘도라의 사례’를 연상시킨다. 분석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도라를 분석하는 데 끝내 실패한 이유는 그가 도라의 파편적인 무의식에 인과론적인 틀을 부여하고, 자신의 욕망을 그녀에게 투여했으며, 무엇보다 도라가 분석자를 꿰뚫고 조롱하는 피분석자였기 때문이다. 조와 샐리그먼이 나누는 대화와 관계는 표면적으로 이 구도를 의식한 것처럼 보인다. <님포매니악>을 ‘하드코어 포르노’라고 명명하는 감독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대다수의 관객에게 의미화되는 방식도 그런 구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영화를 본 뒤 인터넷에서 접한 후기 중에, 이 영화가 생각보다 덜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감상들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감상만큼 눈에 띄었는데, 이미지들이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보다는, 그 이미지들의 외설스러움을 해소해줄 만한 무언가가 영화에 있다는 표현처럼 들렸다. 그런 감상은 아마도 이 영화가 위에서 언급한 이항대립적인 구도로 비교적 명징하게 분석된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말할 때, 그 충격은 낯설고 불명료하며 기이하고 불쾌하지만 매혹적인, 그러니까 언어화하기 어려운 감각에서 기인한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이 영화가 충격적이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라면, 위의 견해들과 생각이 좀 다르다. <님포매니악>은 색정증에 대한 영화지만, 성욕이 아닌 다른 욕망으로 지탱되는 영화처럼 보이며 그 다른 욕망은 위의 구도나 분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리고 “덜 충격적”이라는 말이 위의 관객에게는 이 영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표현이었다면, 내게 그 말은 선정적으로 활기 넘치는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종종 느껴진 경직된 인상과 관련된 표현이다. 정한석은 <님포매니악>에 대한 기사에서 “놀랍고 충격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주술을 걸 줄 아는 폰 트리에입니다만, 이번에는 이야기에도 적잖이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씨네21> 959호)라고 지적했는데, 바로 그 “이야기”라는 단어가 이 영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색정증보다 중요한 용어로 보인다.

청자를 염두에 둔 이야기 자체에 대한 욕망

“내 모든 구멍을 채워줘.”(Fill all my holes) 조가 섹스를 하면서 절박하게 내뱉던 이 말은 자신의 애인 P를 빼앗긴 낯선 남자에게 폭행을 당한 뒤, 비참하게 쓰러진 자리에서도 반복된다. 처음에는 만족을 모르는 조의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되지만, 이 후반의 장면에서 그 문장은 성욕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더 복잡한 심연의 결핍을 향하고 있다. 결국 남자로도, 여자로도, 채찍으로도, 아이로도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구멍 앞에서 실패의 처참한 끝에 도달한 여자. 지금 조는 그 실패의 끝에서 샐리그먼의 작은 방에 와 있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실현 불가능한 문장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여자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어떤 상대로도 결국 채워지지 못하는 그녀의 욕망은 이제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샐리그먼의 방에서 그의 사물들이 불러일으키는 연상작용으로 과거에 대한 조의 고백이 이어지고, 그 고백 이후에 샐리그먼의 분석이 따라오지만, 이 색정증의 연대기를 범주화하고 나열하는 자는 조 자신이다. 마치 샐리그먼이 이끌어준 방향 안에서 조의 파편적인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이 파편들을 일관된 줄기로 엮어가는 사람은 조인 것이다. 그녀는 수많은 색정증의 일화 중에서 자신이 들려줄 이야기를 선택하고 각 장 안에서 하나의 덩어리로 구성해낸다.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성욕의 일대기를 말하는 방식이 그녀의 의지에 의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성적 욕망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녀의 서사적 욕망이 시작된다. 아니, 영화가 진행될수록 서사적 욕망이 성적 욕망을 압도한다. 물론 파란만장한 성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그리 특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카트린 M의 성생활>이라는 책에서 카트린 밀레는 십대 때부터 이어진 자신의 자유롭고 남다른 성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성욕을 능동적인 삶의 권리로 인식하는 그녀는 “1인칭으로 글을 쓰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떠나 3인칭 시점을 갖게 한다. 내 몸과 행위들을 자세하게 묘사하면 할수록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고 말한다. 카트린 밀레에게 자신의 성경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방식으로서 결국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자신을 향한 행위다. 하지만 조의 경우,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에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 자신의 성욕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표피적인 차이를 넘어서, 카트린 밀레가 그 욕망을 긍정하기 위해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면, 조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욕망을 병적인 것으로 가두는 듯하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고백이기보다는 청자를 염두에 둔 이야기 자체에 대한 욕망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에 대해 더 말하기 전에, 생각해볼 질문이 있다. 조는 왜 그토록 성에 집착하게 되었을까. 정신분석학적으로 너무 상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영화가 깊이 제시하지 않아서인지, 잘 제기되지 않는 물음인 것 같다. 물론 그 원인을 명징하게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화상으로 드러난 몇몇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조의 서사적 욕망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가정해볼 수 있다. 조의 엄마는 그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차갑고 냉정한 여자로 기억되고 조는 종종 엄마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조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애정과 동경의 대상이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어린 조가 의사였던 아버지의 책상에서 의학서적을 보며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이름들을 읽는다. 아버지는 딸의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고, 조는 고개를 들어 묘한 표정으로 아버지와 시선을 교환한다. 소녀가 사로잡힌 성적 호기심, 의사 아버지의 엄숙한 책상, 의학 서적의 차가운 신체 그림, 소녀의 입으로 발음되는 여성 성기, 그리고 아버지와 딸이 나누는 시선의 공기. 애정으로 가득하지만 어딘지 기괴하고 부적절한 이 장면에서 근친상간적 욕망의 그림자를 읽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조의 욕망은 이후 ‘섬망’이라고 이름 붙여진 장에서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에드거 앨런 포의 문구로 시작되는 이 장은 유일하게 흑백의 화면으로 삽입된다.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포가 삶의 끝에서 경험한 섬망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전까지 감정을 연기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던 소녀는 죽음에 가까운 아버지 곁에서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때마다 병원 직원과 섹스를 한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어서 수치스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대신, 그녀의 성기에서 물이 떨어진다. 말하자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 조가 불감증에 걸려 고통에 빠져드는 계기를 영화는 제롬과의 재회와 사랑의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아버지의 상실과 그에 대한 애도가 실패한 탓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조에게 아버지의 세계는 텅 빈 상태로, 혹은 수수께끼인 채로 남는다. 아버지가 겪은 섬망의 정체를 그녀는 끝내 알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이미지가 있다면, 조가 아버지와 함께했던 숲에 대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어린 조를 데리고 숲에 가서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초록빛 나뭇잎들의 물결, 그 아래 누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어린 딸의 이미지는 육욕에 휘청대는 조의 기억에서 가장 이질적이며 향수에 젖어 있다. 겨울이 되어 잎이 모두 떨어진 뒤에도 특유의 검은 봉오리로 존재의 특이성을 잃지 않는 물푸레나무의 이야기는 이후 자괴감에 빠진 조를 잠시나마 깨어나게 하는 색정증 이전의 맑음 같은 것이다. 그녀에게 나무의 이야기는 욕정에 지배되지 않는 식물의 청명함과 벌거벗은 뒤에도 자신의 뼈대를 잃지 않는 꼿꼿한 기품에 대한 것이다. 피폐한 색정증의 삶 안에서 그녀가 자신의 나무를 찾고자 할 때, 그것은 일종의 초자아를 찾아 헤매는 갈망처럼 보인다. 색정증, 나무, 아버지, 그리고 이야기. 이들을 명확한 인과관계로 연결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작용하고 있으며, 조의 성욕과 서사적 욕망은 그 요소들 안에서 모종의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후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려는 조의 눈앞에 비틀어져 기울어진 형상으로 산꼭대기에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보인다. 우리는 그 순간 두 존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왜곡된 성욕(왜곡된 형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뿌리로 지탱되는 이야기(나무)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나무는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조는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균형 잡힌 색정광의 해명 가능한 이야기

조가 성욕의 인간이기 전에 서사적인 인간이며, 어쩌면 둘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수많은 예들이 이 영화에는 있다. 1. 어린 조가 친구 B와 기차에서 누가 더 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지 내기를 벌이는 장면에서, 마지막 타깃은 일등석 칸의 세련되고 점잖은 남자를 향한다. B는 그를 유혹하는 데 실패하지만 조는 성공한다. B가 그저 육체로 승부를 보려 했다면, 조는 남자로부터 그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며 그의 빈틈을 파악한다. 즉 B에게는 없으나 조에게 있는 것은 (좀 과장을 보태 표현해서) 섹스를 서사로 풀어내는 능력이다. 2. 과거의 경험을 들려주던 현재의 조가 다른 남자들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에 그 어떤 흥분도 하지 않는 샐리그먼에게 섹스의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낼 때, 그녀는 어쩐지 불만족스러워 보인다. 샐리그먼은 자신의 그런 점이 그녀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듣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 거리감을 딱히 고마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꾼은 자신의 이야기에 연루되지 않는 청자를 반가워하지 않는 법이다. 3. 색정증에 대한 주변의 시선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조가 사채 수금 일로 성공을 하는데, 그 방식이 독특하다. 그녀는 성욕에 대한 상상적인 스토리를 고안해서 상대의 수치심을 자극하고 건달들의 무식한 위협 없이도 효과적이고 우아하게 돈을 받아낸다. 4. 조의 이야기를 듣던 샐리그먼은 제롬이라는 남자가 조의 결정적인 삶의 국면마다 등장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우연이라고 믿지 못하지만, 그의 의문은 바보 같다. 이야기의 성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필연적인 우연이다.

조가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나와, 샐리그먼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수치심과 죄의식을 말하는 순간들을 환자의 자기반성적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치심은 단순한 후회나 자기부정이 아니라, 언제나 환상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해, 수치심은 내가 무언가를 부정하지만 실은 내가 그것을 은밀히 즐기고 있을 때 생기는 감정에 가깝다. 조는 지금 성욕에 지배된 자신의 지난 행위가 나쁘다고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말하는 행위는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끊임없이 수치심과 죄의식을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줌으로써 이야기 밖의 우리 혹은 샐리그먼은 그 색정광의 연대기를 불편함 없이 즐기는 자리에 앉게 된다. 이 영화에서 수치심이란 이야기를 추동하는 일종의 전략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님포매니악>이 실은 조의 성적 욕망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경유한 서사적 욕망과 실은 더 깊은 관계를 가진 영화라면, 찬찬히 쌓아올린 이야기를 단번에 허무하게 만드는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동이 터오고, 이야기의 모든 비밀은 풀렸다. 조는 이제는 무성(asexuality)의 인간으로 살기 위해 애쓰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깨달음의 말들은 모두 가짜 같지만, 특히 이 결심은 새삼스럽고 어느 정도 거짓말이다. 샐리그먼의 방에서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던 그녀는 그 시간만큼은 자신의 색정증에 지배되지 않는 전능한 이야기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샐리그먼의 비참한 결말은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야기 안과 밖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이야기의 끝을 알아채지 못한 무지, 감히 이야기 속의 인물과 몸을 섞으려 한 무지, 청자의 위치를 망각한 무지. 그러고보면, 적어도 이 영화의 현재에서 육체적인 인물은 조가 아니라 샐리그먼이다.

결국 조는 섹스를 통한 파괴적인 소모의 욕망과 그 욕망을 이야기로 질서화하려는 회복의 욕망을 동시에 지니는 인물이다. 이상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균형 잡힌 색정광이다. 그녀의 색정증은 그녀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어둠의 활력이나 파열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대신, 이야기의 욕망에 봉사하는 것 같다. 그게 이 영화의 결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영화의 의외의 점잖음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힌트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정상을 말하지만 정상의 얼룩, 정상의 균열지점으로서의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의 저 반대편에 뚝 떨어져 존재하는 비정상의 극단적인 그림들. 극단적인 이미지들은 넘치지만 외상이 지워진 해명가능한 이야기.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내게는 대부분 그렇게 다가왔고, <님포매니악> 역시 그러하다. 조의 색정증은 매혹적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종종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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