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비웃음에관하여

<님포매니악>에 대한 사적 소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색정광 여인 조(샬롯 갱스부르)의 파란만장한 성 편력을 밤새 듣고 난 남자 샐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드)은 정중하게 “잘 자라”라는 인사를 하고 방문을 나선다. 그는 금방 되돌아온다. 그러고는 갑자기 이불을 들치고 그녀의 질에 자신의 성기를 들이민다. 여인이 소리친다. “안 돼요.” 무지 화면이 뜨고 남자가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수천명이랑 잤잖아.” 무지 화면이 계속되고 총소리, 여인이 옷 입는 소리, 방을 나서는 발소리가 들린다.

<님포매니악>의 마지막 장면은 황당하다(여기선 볼륨1과 볼륨2를 묶어 한편의 영화로 다룬다). 샐리그먼은 성욕이 없는 무성애자이며 여자와도 남자와도 자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박식한 교양인이며 독서광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도한 강간자로 돌변한 걸까. 그리고 “생애 첫 친구를 얻었다”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던 여인은 왜 거부의 과정도 없이 바로 총을 쏘았을까.

우리는 이 남녀의 돌발적인 행동에서 갖가지 인간적인 이유를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양자의 행동을 이해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장면은 유머다. 강간과 살인이라는 난폭한 장면을 유머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관객인 우리가 샐리그먼의 발기되지 않은 성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 시간에 걸쳐 온갖 성기를 만났고 강력한 형상의 남근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샐리그먼의 풀 죽은 성기를 그냥 지나치긴 힘들다. 발기되지 않은(아마도 그럴 수 없는) 성기로 덤벼들다 총 맞아 죽은 중년의 무성애자 지식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해괴한 유머에는 기묘한 비웃음이 있다. 색정증이라는 욕망의 짐을 짊어진 한 여인에 관한 캐릭터 탐구처럼 보이는 이 영화를 특별한 유머로 끝맺으면서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포르노그래피적 표현의 충격과는 다른 종류의 충격효과를 원했던 것 같다. 영화 전체에 대한 논평과 분석은 이미 정한석(<씨네21> 959호)과 남다은(<씨네21> 964호)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여기서는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그 비웃음에 응답하고 싶다.

2.

<님포매니악>은 <안티크라이스트>(2009), <멜랑콜리아>(2011)에 이은 라스 폰 트리에의 ‘우울증 3부작’의 완결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명칭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다른 이름들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색정광 3부작, 신성모독 3부작, 안티크라이스트 3부작 등등. 물론 어느 명칭도 그럴듯하지만 적절하지는 않다.

다만 이 명칭들이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고 말할 수는 있다. 우울증, 색정광, 신성모독, 안티크라이스트…. 그런데 이 명칭들이 공유하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그것은 여인이다. 세편에서 모두 여인이 우울증자이고 색정광이며 신성모독자이며 적그리스도이다(<안티크라이스트>의 상영본에 새겨진 제목은 <Antichris♀>이다). 세 영화를 ‘마녀 3부작’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3부작은 사실 매우 단순한 도식 위에 서 있다. 이성, 과학, 질서, 신앙, 문명 등이 한편에 있고 욕망, 마성, 혼돈, 자유, 자연 등이 맞은편에 있다. 전자는 남성에게, 후자는 여성에게 귀속된다. 3부작을 양자의 대립으로 구도화한 뒤, 전자를 회의하고 후자를 동경하는 작품들이라고 정리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세계는 진부한 것이 된다. 20세기 전체를 통틀어 진지한 사유와 예술은 대부분 그랬기 때문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오히려 이 대립구도 자체를 교란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영화는 우리 대부분이 공유한 대립항의 독법이라는 관습을 교란한다. 아이러니, 자리바꿈, 모호하지만 현란한 사악과 공포의 이미지가 그가 애용하는 교란의 수사학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종종 허세에 가까운 지적인 제목을 붙이고, 시대적 종교적 알레고리로 읽기를 유도하는 대립구도를 설정한 뒤, 갖가지 상징과 패러디를 촘촘히 배치한다. 그런 다음 그의 영화를 보는게 아니라 해석하려는 우리의 독법을 혼란의 진창으로 이끈다.

이것은 일견 유보 없이 존중할 만한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예술활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구분해야 할 지향이 있다. 라스 폰 트리에의 관심은 우리의 지식과 인지 체계의 내재적 한계가 왜곡해 가려진 진실에 있는 게 아니라, 지적 활동 자체를 무효화하고 폐기처분하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의 영화가 혼돈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고도로 인공적인 그의 이미지들은 혼돈이라는 실재의 사태 자체를 향한 게 아니라, 우리 좌뇌의 오작동을 위한 바이러스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말들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안티크라이스트>의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떠올려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부모가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동안 아이는 침대를 빠져나와 베란다로 간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 <울게 하소서>가 장중하게 흐르고, 내리는 눈과 인물들의 움직임은 우아한 슬로모션으로 묘사된다. 아이는 곧 베란다에서 추락사한다. 이것이 부모의 지옥도(사실은 인간 존재 자체의 지옥도)를 그린 영화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베란다로 가던 도중 부모의 정사 장면을 보던 아이가 눈길을 돌려 카메라를 쳐다보며 기묘한 웃음을 짓는다. 아이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냉소적이고 음산한 미소. 이 기분 나쁜 미소의 정체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숏을 근거로 이런 분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아이는 부모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 사고사한 가련한 존재가 아니라, 부모에게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을 안겨주기 위해 자살을 감행한 악의적, 어쩌면 악마적 존재다.’ 하지만 이 분석은 틀렸다. 엄마가 고의적으로 신발의 좌우를 바꿔 신겨 아이의 발을 미세하게 기형으로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이 이후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이의 죽음은 사실상 엄마의 살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추락 위험의 순간을 예견하고 그 순간에 균형을 잡기 힘들도록 오랫동안 준비해온 엄마는 믿기 힘든 예지력과 치밀함을 갖춘 완전범죄자가 되어야 한다.

사고사, 자살, 살인. 라스 폰 트리에는 이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쪽도 진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둔 게 아니라, 어느 쪽도 믿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양자의 차이는 중대하다. 진실의 확정 불가능성과 진실의 원천적 부재는 완전히 다른 지적 태도의 표현이다. 전자의 예술가는 실재에 열려 있으며 사물을 듣고 만진다. 후자의 예술가는 현실적인 것의 위악적 변형만을 끝없이 추구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정당한 유산을 공유한 다수의 작가들이 전자에 속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는 (아마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함께) 후자에 속한다. 그의 영화는 이미지의 인공 지옥이다(라스 폰 트리에는 한때 이와 상반된 듯 보이는 ‘도그마 선언’을 주도했지만, 그때도 그의 관심사는 실재가 아니라 인위적 규칙들이며, 그 규칙들의 효과였다).

<안티크라이스트>의 그 숏으로 돌아와보자. 아이는 음산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 카메라를 향해,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우리를 향해 웃고 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어쩌면 친절하게도 이 영화 전체가 우리를 향한 비웃음이라는 사실을 혹시라도 알아채지 못한 관객이 있을까봐 ‘관객을 쳐다보는 아이의 비웃음’이라는 더할 나위 없이 인공적인 표정과 시선의 이미지를 삽입한 것처럼 보인다. 아이의 비웃음은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비웃음 자체에 직면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비웃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관객 양반, 어디, 이 비웃음도 한번 해석해보시지.”

이 장면은 <님포매니악>의 두 장면에서 변주된다. 하나는 조의 출산 장면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웃는 모습이 천장의 조명등에 어렴풋이 비친다. 조는 그 웃음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하고 샐리그먼은 “그건 악마의 징조”라고 평한다. 다른 하나는 조가 SM 서비스를 받기 위해 외출했을 때, 아이가 베란다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여기서도 <안티크라이스트>에서처럼 <울게 하소서>가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아이는 추락하기 전에 구제되고 악마적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 변주의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안티크라이스트>를 본 관객의 연상과 추론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어렴풋한 웃음은 ‘악마’ 운운하는 논평자 샐리그먼과 <안티크라이스트>의 관객을 동시에 겨냥한 비웃음이다.

<멜랑콜리아>에서 우울증자이자 비웃음의 주체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이고 비웃음의 대상은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확대된다. 언니의 과학자 남편이 대변하는 지식도, 언니의 모정도 저스틴의 냉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지구와 충돌할 행성이 다가오고, 언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그때 저스틴은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는 지구를 위해 슬퍼할 필요가 없어.” 아마도 3부작의 또 다른 이름은 비웃음이 될 것이다.

3.

<님포매니악>은 3부작의 두 전작에 비해 지루하다. IMDb 사이트에 한 관객은 “이 영화는 포르노그래피를 본 적 없는 50, 60대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다”라고 썼는데, 동의할만하다. 여인이 자신의 음핵을 가위로 잘라내고(<안티크라이스트>), 지구가 폭파되는 장면(<멜랑콜리아>)까지 본 관객에게, 그리고 자극적인 난폭한 이미지에 중독된 동시대인들에게 이 영화의 외설적 장면들이 충격을 주긴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두 전작에서 보는 이를 동요케 했던 사악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들이 거의 없다.

사실 <님포매니악>은 이야기의 면에서도 에덴동산의 존재 자체를 원죄라고 간주하는 <안티크라이스트>나 지상의 모든 존재를 조롱하는 <멜랑콜리아>에 비하면, 라스 폰 트리에답지 않게 온건하고 소박하며 심지어 (마지막 장면을 제외한다면)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색정증이라는 무거운 욕망의 짐을 지고 살아온 외로운 여인이 “내게 죄가 있다면 황혼이 좀더 아름답길 바란 것뿐”이라고 말할 때는, 한편의 온전한 휴먼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적인 소감은 좀 다르다. 나는 이 영화는 보고 있기 민망했는데 그건 외설적인 표현 때문이라기보다 여인의 성 편력을 듣고 있는 샐리그먼의 말들 때문이다. 논평하기를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그의 말은 분석적이고 현학적이지만 대부분 쓸모없는 소리며 종종 초점을 벗어난다. 조는 샐리그먼의 논평을 은근히 조롱한다. 그가 ‘프루직 매듭’에 관한 얘기를 들려줬을 때 조는 “그나마 가장 덜 빗나간 말”(the weakest digression)이라고 대꾸한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자는 여자를 치료하려고 한다. 그의 목적은 이성으로 비이성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님포매니악>에서 남자는 여자를 해석하려 한다. 그의 목적은 이성으로 비이성을 포용하려는 것이다. 물론 성공할 리 만무한 시도다. 샐리그먼은 정확히 평론가의 자리, 그것도 실패하는 평론가의 자리에 있다. 그는 역사, 종교, 정신분석, 수학, 낚시에 걸친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그의 말은 계속 헛발질한다. 그의 지식이 아니라 그의 실패 패턴이 평자인 나의 실패 패턴을 고스란히 연상시킨다. 그는 지식을 자랑하듯 온갖 레퍼런스로 확대해석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오류를 과시하듯 지적하거나 고통과 격정의 순간을 현학적 비유로 대체한다. 무엇보다 그는 가족애, 인간애 따위의 휴머니즘 테두리 안에 머물며 여인의 욕망이 지닌 비인간적인 중핵에 이르지 못한다.

<님포매니악>은 색정광 여인의 일대기라기보다, 실패한 평론 사례집처럼 보인다. 더 주관적으로 추측한다면 이 영화는 <안티크라이스트>(혹은 <멜랑콜리아>)에 대한 현학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따뜻한 인간주의적 비평들의 ‘역겨움’에 대한 응답처럼 느껴진다(자신에 관한 다큐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나와 내 영화에 대한 모든 말과 글은 모두 거짓”이라고 단언했다. 짐작건대 그는 악평을 더 좋아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조는 이야기꾼의 자리에 있다. 이야기꾼은 최소한의 단서만으로도 이야기를 풀어내고, 비평가는 드물게 이야기꾼에게 힌트를 주긴 하지만 대개 변죽만 울리는 존재다. 내게는 조의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꾼과 평론가의 알레고리로서 둘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마지막 장면의 문제로 돌아와보자. 이 장면을 이성적이고 인간적으로 납득할 방법은 없다. 나는 라스 폰 트리에가 어떤 암호를 숨겨놓았는지 알지 못한다. 현재의 구술 및 논평과 과거의 사건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은 처음이자 끝으로 현재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과 함께 샐리그먼의 부질없는 논평을 들어왔지만, 현재의 사건에 대해선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 논평자는 죽었고, 영화는 끝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다. 이제 우리의 박식한 비평가도 죽었으니 이 장면의 논평은 (영화를 보는) 당신이 한번 해보시지.

그토록 박식한 샐리그먼이 허튼소리만 했다면, 이 장면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해석이 아니라 조의 말을, 이야기꾼의 욕망과 충동을 곧이곧대로 듣는 것이다. 그녀는 전남편 제롬과 제자 P가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떠나려고 하다가 돌아와 제롬을 죽이려 한다. 하지만 총알이 발사되지 않아 실패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죠. 내 생각엔, 안 죽이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인간에게 살인은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예요. 우린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조는 이 장면 이전까지 살인에 대해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그녀가 질투, 배신감, 절망 따위가 아니라 살인 욕구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때, 샐리그먼은 그걸 새겨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훨씬 전에 “내게 죄가 있다면 황혼이 좀더 아름답길 바란 것뿐”이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해야 했다. 그러는 대신 그는 이렇게 응답한다. “(총알이 발사되지 않은 것을) 당신은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무의식적인 거부였다고 봐요. 겉으로는 죽이고 싶었어도, 속에선 인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 거죠. 총을 당겨야 한다는 지식을 (안전장치 해제를 잊어버린) 건망증으로 살짝 덮어버린 거예요.” 프로이트와 휴머니즘을 결합한 이런 모범적인 분석이 그녀에게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어야 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꾸한다. “엄청나게 상투적인 얘기여서 당신 주장에 반박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너무 피곤하네요.”

마지막 장면은 실은 황당하지 않다. 그건 피곤해서 미루고 싶었으나 보채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하게 된 반박 같은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명쾌한 반박은 있을 수 없다. 조금 귀찮게 하는 것만으로 그녀는 살인할 수 있다. 발기되지 않은 강간자라는 설정은 유머이지만 이 유머는 강간과 살인의 인과관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이야기꾼의 말을 제대로 들어왔다면, 마지막 장면은 해석은 물론이고 설명조차 필요 없다. 이게 우리의 결론이라면, 이건 유용한가.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이렇게 결론 맺고 나면 여기 적힌 말들도 결국 쓸모없어진다. 영화에서 이미 말해진 것을 더 보탤 것도 없이 다시 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말하려는 순간 어떻게 해도 헛발질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장면의 비웃음이다.

그런데 이 비웃음은 전작들의 사악하지만 강력한 비웃음에 비해 어쩐지 왜소하고 뭔가 도피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욕정과 충동의 화신과 무기력한 불능의 지성의 만남이라는 설정의 이야기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출구 찾기에 실패한 건 아닐까. 결말의 돌발성과 비웃음은 혹시 그 실패를 가리기 위한 또 다른 위악적 제스처는 아닐까.

후기) 해석하려고 애쓰는 건 라스 폰 트리에의 함정에 걸려드는 것 같아 사적 소감을 쓰려 했다. 그래도 함정을 피하긴 힘들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