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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환의 영화비평] 겸손한 응답 뒤의 애상

<한여름의 판타지아> 1장과 2장이 서로를 마주볼 때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첫사랑, 요시코’라는 1장과 ‘벚꽃우물’이라는 2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옴니버스영화다. 아마도 관객은 정보 전달에 가까운 1장보다는 <비포 선라이즈>(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1996)의 감성에 맞닿아 있는 2장의 매력에 더 빠질 듯하다. 실제로 2장은 ‘한여름의 판타지아’라는 제목이 그리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1장의 매개 없이 2장과 바로 마주했다면, 우리는 과연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경험할 수 있을까? 물론 김새벽이와세 료의 로맨스가 알콩달콩한 재미를 주긴 하지만, 1장 없는 2장은 그저 그런 로맨스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장과 2장이 서로를 마주볼 때만이 그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영화다. 그 엔딩까지도.

현재의 시간, 생명의 부활

두말할 것도 없이, 1장 ‘첫사랑, 요시코’는 장건재가 경험한 고조에 대한 기록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제작자인 가와세 나오미를 비롯해 고조에 익숙한 스탭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장건재는 그 누구의 시선도 경유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맨눈에 비친 고조를 담으려 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어느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다. 손님들은 마주보는 상대 없이 제각각 앉아 있다. 영화는 단 한 사람, 이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태훈만 나눠 찍은 뒤 두숏을 이어 붙였다. 어쩌면 이 나눠찍기와 편집은 고조에 대해 영화를 찍는 장건재의 태도일 것이다. 장건재는 자신이 낯선 곳에 던져진 이방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시선으로 고조를 바라본다.

1장 후반부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그 제목이 왜 ‘첫사랑, 요시코’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1장의 고조는 첫사랑의 풋풋함이 놓일 곳이 없어 보인다. 현재는 없고 과거의 흔적만이 가득한 곳, 또는 시간이 멈춰버린 곳. 1장의 고조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흑백 화면은 고조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더 길고 짙게 한다. 고조의 이러한 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미정(김새벽)과 헤어진 태훈(임형국)이 숙소로 돌아가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태훈 옆으로 자전거 탄 소녀가 지나가는데, 꿈과 현실의 경계에 위치한 이 장면의 분위기는 유령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고조의 현 모습과 잘 어울린다. 길을 잃은 시간이 더운 바람을 타고 유령처럼 부유하는 곳.

그런데 그런 고조가 2장 ‘벚꽃우물’에 오면 너무나 다른 느낌을 준다. 2장은 1장과 동일 공간을 반복해서 보여주지만, 그 느낌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1장의 고조에 대해 (굳이) 좋게 말한다면 고즈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답답함이 깔려 있다. 그런데 2장의 고조는 생동감이 넘친다. 귀향 청년 유스케(이와세 료)와 혜정(김새벽)은 길을 걸으며 반복해서 덥다고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이틀간의 여행은 찌는 더위를 밀어내는 청량한 바람이 가득하다. 그들이 서툴게 머뭇거릴 때마다 영화는 생기가 돈다. 청량한 바람을 타고 시간이 흐른다. 유스케와 혜정의 로맨스가 진행되면서, 고조에는 어제와 다른 오늘이, 오늘과 다른 내일의 기대가 넘실댄다. 그렇게 고조에 시간이 흐른다. 죽음이 시간의 소멸이라면, 시간은 살아 있는 자들의 특권이다. 장건재는 시간이 멈춰 있던 고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 마법 같은 변화야말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한여름의 판타지아’이다.

응답의 영화

장건재가 꺼내든 고조를 소생시킬 처방책은 과거의 추억을 현재의 시간에 되살려내는 일이다. 1장에 등장한 고조 시민들 모두는 과거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사연은 각기 다르지만,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2장 ‘벚꽃우물’은 1장에 제시되었던 내용을 재구성하고 있고, 이 때문에 태훈이 연출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혜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1장은 ‘재료’인 셈이다. 귀향 청년 유스케는 벚꽃우물 앞에서 그에 얽힌 민담을 들려주는데, 반쯤은 실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고 반쯤은 그가 지어낸 이야기다. 2장이 1장을 다루는 방식도 그러한데, 그것이 2장 제목이 ‘벚꽃우물’인 이유다. 하지만 2장이 태훈의 영화인가, 아닌가 하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2장이 1장에 대한 ‘응답’ 또는 ‘소망 충족’ 형식을 갖는다는 점이다. 1장 말미에 실로폰을 연주하던 요시코는 교실로 들어서는 태훈에게 “겐지, 왜 이렇게 늦었어? 계속 기다렸는데”라고 말한다. 2장은 요시코의 이 오랜 기다림과 바람에 대한 응답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그리고 2장이 고조에 건네는 진심어린 선물처럼 느껴진 까닭도 바로 이 ‘응답’의 겸손함 덕분이다.

2장 후반부에 귀향 청년 유스케와 혜정은 폐교로 향한다. 그리고 혜정은 요시코가 연주하던 실로폰을 연주한다. 장건재는 이 장면을 요시코가 등장했을 때와 동일한 구도로 연출하는데, 이때 화면으로 안으로 들어온 유스케는 혜정 옆에서 실로폰을 함께 연주한다. 그렇게 요시코는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답을 받는다. 과거의 유령이 되어버린 요시코에게 혜정이라는 현재의 몸을 주는 것. 물론 혜정은 그 이상이다. 그녀는 배우를 꿈꿨던 대학 시절의 유스케이자, 겐지가 오사카에서 잠깐 사귀었던 한국인 유학생이기도 하다. 결국, 배우 혜정은 고조가 과거에 잃어버린 것들을 연기하며 그것을 현재의 시간에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혜정은 진짜 배우가 된다. 혜정과 유스케의 로맨스는 고조에 흐를 수 있었던 또 다른 시간, 그러니까 1장의 죽어가는 고조 아래에 흐르던 또 다른 시간의 모습이다. 잠재된 시간,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아니지만 일어날 수도 있었을 사건들의 시간. 2장이 고조를 가능성으로 충만한 공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잠재된 시간을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폐교의 긴 복도는 1장과 2장 모두에 등장하지만, 카메라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우리는 카메라 뒤편을 볼 수 없다. 이처럼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에 어떤 맹점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듯이, 현실화된 사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잠재된 사건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 잠재된 시간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카메라로 응답할 때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1장과 2장의 관계 속에, 또는 ‘영화 속의 영화’ 형식으로 장건재가 말하고자 했던 영화의 역할일 것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각 장을 불꽃놀이로 운을 맞춰 끝내면서 태훈, 유스케, 혜정의 감정을 한데 모으려 한다. 정지혜는 이 불꽃놀이 장면에 대해 “거대한 에너지가 한순간 폭발해 소멸하는 불꽃이 마치 인생에 대한 은유로 읽히는 찰나”라고 말한다(<씨네21> 1008호). 이 엔딩에 대해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혜정의 얼굴이다. 장건재는 마치 쿨레쇼프 실험이라도 하겠다는 듯,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 뒤에 혜정의 무표정한 얼굴을 이어 붙였다. 그것이(불꽃놀이와 연결된) 편집의 효과라고 해도, 그 얼굴에는 애상감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정서와 함께 청명한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던 영화는 다시 1장의 고조에 다가선다. 그 무겁고 어두운 땅에.

그러고 보면, ‘죽음을 향해 가는 생명의 여행’(vadomori)으로서의 우리의 삶을 보여주기에 불꽃놀이만 한 것이 또 있겠는가. 이 엔딩은, 장건재는 한없이 맑기만 한 영화를 원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은.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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