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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영화비평] 여백으로 남은 물음

신중하나 아쉬움이 남는, <소수의견>이 제출한 정의에 관한 명제

<소수의견>

<소수의견>은 잘 만든 법정 드라마로 손색이 없지만 픽션보다 더 개연성이 없는 현실을 의식한 탓인지 매듭이 불완전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사건의 실체는 끝내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다. 대신 사건 당사자들의 감정이 극적으로 부각되는데 나는 그게 좀 이상해 보였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주인공 변호사들의 노력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법정의 판결은 두루뭉술하며 변호사들이 구출하려 했던 피해자들은 깊은 절망과 회한에 빠진다. 사건의 실체를 가림막했던 국가기관의 당사자들은 어느 누구도 징벌받지 않고 그들 모두 앞으로도 무탈하게 살아갈 것이 암시된다. 이것은 감독 김성제의 정직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가 지금보다는 더 주목받기를 원했던 평자로서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변호사 윤진원(윤계상)과 장대석(유해진), 기자 공수경(김옥빈)이지만 정작 말미에 정서적 초점을 맞추는 인물은 피고인 박재호(이경영)다. 박재호는 철거현장에서 경찰들에 맞서 싸우다가 경찰을 죽였고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그는 동시에 현장에 들렀던 어린 아들도 잃는다. 그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박재호는 자기 아들을 죽인 건 철거용역 깡패가 아니라 경찰이라고 주장한다. 박재호가 죽인 경찰 김희택의 아버지는 박재호처럼 가해자이자 피해자이지만 영화 내내 간간이 화면에 비칠 뿐이다. 이들 두 아버지는 클라이맥스 법정 장면에서 만난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경찰인 자기 아들이 박재호의 어린 아들을 죽였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그랬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같은 이유로 박재호를 증오하지 않는다. 박재호가 그랬다면 자기 아들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 장면은 부조리한 국가권력의 전횡에 맞선 변호사의 싸움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로 초점을 잠시 맞춘다. 그들은 당면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는다. 박재호는 김희택의 아버지에게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하며 흐느낀다. 김희택의 아버지도 흐느낀다. 이 장면은 감상적이지 않다. 정서적 폭발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연출로 담담하게 화면이 이어진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 윤진원 변호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구경꾼이다. 관객 역시 방관자의 입장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연민이나 동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들의 개별적 비극은 개별적으로 남을 뿐이고 그들은 희미하게 염치라는 감정만으로 서로 연결될 뿐이다. 그들은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며 자기 아들 때문에 상대방 아들이 죽었다는 것에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그들이 갖는 최소한의 염치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 대해 판단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는다. 김희택의 아버지가 말한 피치 못할 사정은 정확히 발화 대상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해자이자 피해자의 멍에를 씌운 건 공권력을 남용한 경찰이었다. 경찰의 상급기관인 검찰은 경찰의 공권력 남용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명분으로 덮으려 한다.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그물망 아래 불행을 겪는 이는 아들을 잃은 이들 두 아버지뿐이다.

<소수의견>

진실과 사실

여기서 진실은 무엇이고 사실은 무엇일까. 김성제 감독은 사건의 전후 맥락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변호사 윤진원이 그랬듯이 우리는 주어진 정황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법정 드라마의 흐름을 따르는 이 영화가 사건을 추론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 법정에서 증명되는 것은 사실상 없다. 뭔가 증명되었더라도 법정에서 판사가 증거로 채택하지 않으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참여재판 최종심에서 윤진원은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철거깡패 김수만을 법정으로 불러 증언을 듣는다. 그는 자신을 회유한 홍재덕(김의성) 검사의 말을 녹음했다. 녹음파일에서 흘러나오는 홍재덕의 말이 법정에 공개된다. 배심원들은 김수만의 증언과 녹취파일을 근거로 박재호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 의견을 내놓지만 판사는 무시한다.

김수만의 증언에 따라 김수만이 아닌 김희택이 박재호의 아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정당방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여하튼 (자기 아들을 죽인) 의경 김희택을 죽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법리적 판결에서 윤리적 질문으로 이동한다. 재판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박재호는 (정당방위를 주장했던 것과 무관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국가권력의 하수인들과 그들이 집행하는 권력기구의 실상은 무정하고 심지어 야비하기까지 한데 그것들의 희생자는 반성하고 있는 결말에서 여전히 진실과 사실은 구별되지 않는다. 갑자기 영화는 박재호의 시점으로 그날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재구성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박재호의 시점에 따른 것이다. 박재호가 그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므로 그것이 진실을 보증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같은 현장에 있었던 김희택의 동료 경찰은 법정에서 끝까지 전후 맥락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이 박재호의 아들을 때리지 않았다는 것만 거듭 증언했을 뿐이다.

<소수의견>은 실화가 아니라 허구임을 매우 단호하게 밝히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용산참사를 비롯하여 이 사회에서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과 비슷한 것은 많이 일어났다. 영화를 보는 관객 대다수는 이 영화가 용산참사에 기초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굳이 허구라는 걸 강조한 것은, 영화가 취한 중립적 입장, 또는 모호한 입장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사실은 불편부당하지 않다. 홍재덕은 윤진원이 증인으로 부른 전직 경찰에게 법정에서 계속 사실만 말하라고 다그친다. 전직 경찰이었던 증인은 그저 정황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당황해서 더듬거린다. 그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검사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 정황과 추측인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사건의 결정적인 어느 시점에 현장에서 사용하던 무전기가 먹통이 된 정황은, 전직 경찰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여겼던 정황은, 경찰이 박재호의 아들을 죽였다고 증명할 만한 사실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 여기서 사실은 그 중요한 순간에 무전기가 먹통이 됐다는 것뿐이다. 앞서 김희택의 동료 경찰이 자기는 박재호의 아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증언한 것처럼 법정에선 부분적 사실들만이 드러날 뿐이고 그 사실들의 총합으로 아들을 죽인 것이 경찰인지 깡패인지, 그리고 그에 따라 박재호가 한 살인이 정당방위인지 고의 살인인지 여부에 관한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가 맨 마지막에 박재호의 회상 장면을 보여주고 박재호가 죄인이라고 기자들 앞에서 회한에 차서 말하는 것은 법리적 결말을 제쳐둔 이 영화의 윤리적 입장이다. 이는 죄 많은 국가권력의 하수인들 앞에서 상대적으로 무구하고 순결한 민초의 입장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이제 변호사로 전업한 홍재덕은 윤진원을 법원 근처에서 만나 궤변에 가까운 자신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그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는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며 그런 가운데 국가는 유지되는 것이다. 그는 죽은 자들을 희생자로, 자신을 봉사자로 호명하며 윤진원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규정한다. 물론 윤진원은 홍재덕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홍재덕이 건넨 명함을 비웃으며 길바닥에 버리고 자기 갈 길을 간다. 윤진원은 이럴 수 있다. 그는 그의 선배 변호사인 장대석과 함께 윤리적으로 각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충 지배 질서에 편입돼 살아가던 그들은 자존심을 갖고 기성질서에 대들 수 있는 사람들로 올라섰다. 결국 영화의 결론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는 윤리적으로 무구하고 윤진원과 장대석은 과거에 비해 윤리적으로 고양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소수의견>

아버지들의 눈물

김성제 감독은 두 변호사와 두 아버지들의 존재를 축으로 놓는 대신에 집단의 도덕과 정의에 대한 물음은 여백으로 남겨놓는다. 이전 <씨네21>과의 인터뷰(1010호 기획 기사)에서 그는 이 영화가 공분과 힐링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의식했다고 밝혔다. 그의 신중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존중한다. 어쩌면 <소수의견>은 저널리즘적 가치를 보존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픽션임을 강조한 이 영화가 저널리즘적 객관성을 결과적으로 지향했다는 건 역설이지만 실제 사건에서 부분적 사실들만을 따와 극화한 이 영화가 맥락적 진실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하다. 사실들의 총합으로서의 진실을 과녁에 맞혀 쏴버리는 쾌감이 이 영화에는 적었다. 그것이 정파적 관점에 따라 갈리는 것이라는 오해를 부름직해도 사실들의 총합으로서의 진실을 좀더 확실히 겨냥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이 사회의 대다수가 잠재적 희생자이며 1%는 애국심의 환상에 찬 가해자이고 잠재적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그 애국심의 환상에 동조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진취적인 윤진원과 같은 사람들의 입장이 더 필요하다. 이것은 공분을 위한 선동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할리우드식 정의의 판타지나 <변호인>식의 현실 추상화와는 다른 각도에서 조금 더 공세적이었으면 어땠을까 해서 아쉬웠다.

정확하게 아버지들의 눈물로 수렴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이 나라 국가기관과 그 기관의 하수인들이 저지르는 부도덕한 정의에 대해 화살을 쏠 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공분은 선동과는 다른 것이며 정의감이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이다. 영화에서 윤진원이 박재호에게 하는 대사, “박살날 때까지 끝까지 가봤어야죠”라는 말은 방관자인 우리에게 통증을 갖게 하는 말이지만 정작 영화는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영화에서 김희택의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흘리는 아름다운 눈물이지만 왜 각성과 연민은 늘 당하는 자들의 것이어야만 하는지 가슴이 아프다.

이 점을 생각해보자. 영화에서 윤진원과 장대석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삼류 변호사의 자조적인 삶에서 빠져나와 자존감을 되찾는 인물들이다.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는 상대방의 아들을 죽게 한 죄책감에서 회한을 품는 인물들이다. 박재호는 그가 저지른 죄 때문에, 김희택은 그의 아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평생 안고 갈 트라우마를 입었다. 이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사건의 현실은 이들에게 비극적인 희생자로서의 자리를 요구한다. 그들이 희생자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들의 희생은 검사 홍재덕이 말한 대로 국가가 강요한 희생이다. 국가,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의 사이비 하수인들이 요구한 그 희생은 부조리하고 야비한 것이다. 그 희생에 대한 명확한 인물들의 자의식은 이 영화의 결말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정권의 담지자들에 따라 서로 다르게 호명되는 국가라는 정체불명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지 못한 채 그들은 끝내 희생자의 자리에서 자존을 회복하지 못한다.

나는 괄호 쳐진 채로 자기 목소리를 발화하지 못하는 이들의 존재를 플롯에서 그냥 묻히게 하고 멜로드라마의 희미한 이입대상으로 만든 것은 감독의 실수라고 본다. 이경영과 장광이라는 노련한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한 아버지의 전형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박재호를 연기한 이경영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연기로 이 인물의 입체성을 두텁게 하려고 했다. 그는 처음엔 자신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며 무성의한 국선 변호인 윤진원을 질책하기도 하지만 힘 있는 법무법인이 사건을 수임하려 하자 윤진원을 배신하고 그쪽을 택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줏대가 없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이경영의 존재감을 통해 그는 뭔가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인물의 인상을 뿜어낸다. 그랬던 그가 영화의 말미에 결국 뿜어내는 것은 회한이고 미안하다는 말끝에 나오는 눈물이다. 김희택의 아버지로 나오는 장광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화 내내 짧은 인터컷을 통해 묵묵히 노동하는 공구상으로 비칠 뿐이지만 결국 법정에 나와 굵은 눈물을 흘린다. 무뚝뚝하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던 그의 존재감도 격한 회한에 힘겨워하는 아버지상으로 수렴된다. 그들의 감정은 끝내 공적인 영역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그들의 미안함은 아버지로서의 정을 통한 동병상련이다.

이에 반해 윤진원과 장대석은 사적 동기에서 공적 동기로 옮겨감으로써 자존감을 이뤄낸다. 심드렁하게 사건을 수임했던 국선 변호사 윤진원이 박재호 사건을 공세적으로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사건기록조회를 허락하지 않았던 검사의 오만방자함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윤진원보다 더 기성인 때를 많이 탔던 장대석의 진화 동기도 비슷하다. 타락한 운동권의 자조감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 그의 변화는 권력 주변에서 기생하는 과거 학교 선배들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고양된다.

<소수의견>은 이 두 변호사와 (현재의 일간지 기사 수준으로는 잘 실감나지 않는) 정의감 넘치는 여기자의 관계를 축으로 이들이 국가권력 집행자들과 대등하게 정신적으로 겨루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을 플롯의 주요 동력으로 삼았다. 매우 빡빡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가끔 잉여의 순간들이 있었다면, 플롯의 흐름에서 잠시 빠져나와 지체되는 그 순간들이 두 아버지들에게 할애됐으면 영화는 더 마땅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지금 버전은 따뜻하되 뭔가 망설이는 느낌을 준다. 불우한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도 불우하다고 느끼는 비루함에서 더 나아가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수의견>은 감동적이었으나 관객인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이 영화가 제출한 정의에 관한 명제도 초라해지는 느낌에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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